지난 주말 사흘 내내 단풍 구경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인천 옆 한 섬과 남도와 서울의 산은 위도와 고도에 따라 다른 색상을 보여줬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그에 반비례해 아직 초록이 남아 있는 것이라든가 산 위로 올라갈수록 원색이 짙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빈틈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세상의 가장 엄한 군대의 기율로도, 가장 뛰어난 스위스 장인의 시계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밀한 섭리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당찮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워야 하는 스승이라는 것을, 그 스승은 자신이 전하는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때로는 현란한 색깔로 눈에 보여주고, 때로는 생생한 소리로써 귀로 듣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가령 남도의 산에 올랐을 때 단풍 사이로 온 몸을 씻어주는 듯 청량한 계곡의 물소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자연의 '육성'이었으니, 천지가 단 일각도 멈춤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쳐주는 소리였다. 그래서 공자는 강가에 서서 우리도 이 강물처럼 주야로 쉬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이며, 남명 조식은 지리산에 열두 번 올라 계곡의 물소리로부터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이리라.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쉼 없는 생명활동의 한 절정이며 매듭이기 때문이 아닐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녹음을 드리우다가는 단호히 결단하듯 초록을 떨쳐버리고는 마지막 남은 정열로 온몸을 불태우는 그 모습에서 생명에게 주어진 은총과 소임을 보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에 어떤 작가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좋은 것은 커피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은 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좋은 것은 발아와 개화와 녹음과 결실과 단풍의 일생을 마치고 장렬히 산화하는, 그 생명의 장엄한 숙명과 신비가 자아내는 향내 때문일 것이라고.
사람의 일생 또한 그럴 것이며, 그 1년의 삶이 또한 그럴 것이다. 매 1년이 또한 출생과 성장과 수확과 휴식이 아니겠는가.
거리에 낙엽이 쌓여가는 이때, 지난 1년을 또 돌아보게 된다. 나는 꽃을 피워 봤는가, 무성한 잎사귀를 거느려 봤는가, 그리고 스스로를 불태워 봤는가. 그리하여 기꺼이 낙엽이 돼서 겨울의 휴식을 거쳐 새로이 살아날 채비가 돼 있는가. 아니, 싹을 제대로 틔워 보기라도 했는가.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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