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 찾아 왔다 요양보호사 된 임명자씨 자매
할머니들과 11년째 동고동락하는 손영미 소장
늘 할머니 건강을 살피는 원종선 간호사
"모시고 산다고요? 아니, 큰 위로를 받습니다."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우리 엄마 계실 때는 내가 애들 키운다고 자주 못 와봤는데. 지금은 할머니들이라도 모실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 엄마는 세상을 떠났지만 매일 할머니들 보니 엄마가 없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쉼터인 나눔의집에는 조금 특별한 이가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이곳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임명자(57)씨. 그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는 나눔의집에서 지냈던 고(故) 박옥련 할머니다. 임씨는 어머니를 찾아 이곳에 들렀다가 나눔의집과 인연을 맺어 2012년 11월부터 아예 이곳 할머니들의 요양보호사로 눌러 앉았다.
지금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지만 어머니가 1993년 당시 나눔의집이 있던 혜화동에 처음 들어갈 때만해도 임씨에게 위안부는 남의 얘기였다. 박 할머니가 딸들에게도 자신의 아픈 과거사를 온전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엄마가 위안부라는 것을 몰랐어요. 엄마가 '전쟁 때 공장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가서 좀 있다왔다'는 소리만 했지 그런(위안부였다는) 소리는 안 했거든요. 그래서 난 몰랐지요. 우리 엄마가 위안소에 가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건 텔레비전을 보고야 알았어요."
1919년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난 박 할머니는 23세 때 직업 소개소를 거쳐 대만으로 강제 동원됐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던 박 할머니를 남편은 논 다섯 마지기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소개소로 팔았다고 한다. 고스란히 할머니의 빚이 된 이 돈을 빨리 갚고 싶었던 박 할머니는 '총 소리 뻥뻥 나는데 가면 잠깐 동안에 돈을 많이 번다'는 소리를 듣고 위문단에 지원했다. 야전병원에서 군인들 옷을 빨아주거나 부상병을 치료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지옥 같은 3년이 지나고 1944년 귀국한 박 할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소실로 들어갔다. 이때 남편 사이에서 1남2녀를 뒀다.
박 할머니는 본인의 기구한 삶을 내색하지 않고 자녀들을 악착같이 키웠다. 이런 어머니의 삶을 뒤늦게 안 딸들은 말년의 할머니를 눈물로 돌봤다. 임씨의 언니 임명옥(65)씨는 나눔의집에서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3년간 조리사로 일하며 끼니 때마다 어머니 박 할머니와 다른 할머니들의 식사를 챙겼다. 2011년 박 할머니가 별세한 이후 동생 임씨도 언니를 따라 나눔의집 가족이 됐다.
임씨 자매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을 제 가족처럼 돌보는 '식구들'은 더 있다. 서울 마포구의 '평화의집' 손영미 소장(54)은 이곳에서 할머니들과 11년째 동고동락하고 있다.
"남들은 제가 할머니들을 케어(돌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아니에요. 한 집에서 가족처럼 같이 사는 거죠. 할머니들이 언제나 저를 더 먼저 생각해주시거든요. 덕분에 제가 지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고요."
2004년 5월 부산의 한 피정의 집에서 근무하던 그는 한 신부의 권유로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 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짐을 챙겨 상경했다.
"할머니들은 지금껏 대부분 혼자 생활하셨잖아요. 할머니들은 먼저 마음을 열지 않아요. 제가 먼저 열어야 했어요. 제가 딸처럼 대하니까 할머니들도 가족이란 개념이 생겼는지 저를 편하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하지만 할머니들은 손 소장에게 절대 하대하는 법이 없다. 딸뻘 되는 손 소장을 꼬박 꼬박 "소장님, 소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손 소장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서로 소장님과 할머님으로 부르는 사이지만 처음 본 사람들은 이들을 모녀지간으로 본다고. "2005년쯤 남대문시장에 이옥금 할머니가 맨 앞에 서고 제가 중간에, 황금주 할머니가 맨 뒤에 서서 간 적이 있어요. 제가 양손으로 할머니들 손을 잡고 가는데 사람들이 '앞에 분은 시어머니고 뒤에 분은 친정 어머니세요?'라고 묻더라고요."
특히 김복동 할머니와 길을 나서면 친정어머니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얼굴이 닮았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그때마다 손 소장은 더 살뜰히 김 할머니를 챙기며 '우리 친정엄마'라고 한다. 이런 손 소장에게 김 할머니는 "고향 까마귀는 좋다"며 미소를 지어준다. 두 사람의 고향은 모두 경상남도 양산이다.
요즘 손 소장의 '모닝콜'은 길원옥(87)ㆍ김복동(88) 할머니가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소리다. 할머니들은 오후 5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6시30분이면 잠자리에 든다. 밤 11시쯤 한 번 깨서 화장실에 가는데 1층에서 자는 손 소장은 2층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나야 안심하고 잠든다고.
아침 식사시간은 이들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이때 손 소장은 하루 일정을 할머니들에게 얘기한다. 할머니들은 손 소장에게 드라마부터 최근 사회 이슈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이때를 이용해 음식을 좋아하는 길 할머니는 "국수가 먹고 싶다, 만두가 먹고 싶다"는 말도 한다. 아침마다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길 할머니가 걱정돼 매번 손 소장은 "안돼요"라고 말하지만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라는 길 할머니의 '투정'에 매번 질 수밖에 없다고.
그가 11년 동안 쉼터를 지키는 동안 정윤홍(1920~2011)ㆍ황금주(1922~2013)ㆍ황순이(1922~2007)ㆍ손판임(1924~2007)ㆍ이옥금(1914~2008)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5월에는 쉼터 1층에 살던 이순덕(96) 할머니가 노환과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정대협에서 캠프를 하거나 지방에 사시는 할머니가 서울에 볼 일이 있을 때 쉼터에서 며칠씩 머물기도 하고, 서울에 계신 할머니들도 원예치료 받으러 쉼터를 방문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쉼터를 찾는 할머님은 이용수 할머니 말고는 거의 없죠."
손 소장의 바람은 할머니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다. 이 때문에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30분 이내로 해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고 난 뒤 힘들어 하는 할머니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서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나"라는 할머니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할머니들의 몸이 편안해지는 것도 좋지만 최대한 빨리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 할머니들이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복동 할머니는 '나는 아직 해방 안 됐다'는 말을 자주 하세요. 마음의 해방이 안 됐기 때문에 해방을 드리고 싶어요. 사과와 배상이 되면 그때는 오로지 건강만을 위해 잘 해드리고 싶은데…. 우리 할머니들이 100세까지 웃으면서 사시면 바랄 것이 없겠어요."
나눔의집에서 근무하고 있는 원종선 간호사도 같은 마음이다. 원 간호사는 "2000년 7월 처음 근무를 시작할 때만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을 하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거동이 힘들어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할머니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언제 응급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원래 출퇴근을 했던 원 간호사는 요새는 나눔의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원 간호사는 집중치료실에 있는 김정분 할머니를 볼 때면 안타까움이 더한다. "세 차례의 뇌경색을 겪은 김 할머니는 지금은 거의 누워 생활하세요. 스스로 뭘 못하시죠. 휠체어 태워서 밖에 나가도 빨리 들어가자고 계속 보채요."
움직이는 시간보다 정지된 시간이 많아지는 할머니들을 지켜보는 쉼터 '식구'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아려온다.
▶'위안부 보고서 55' 온라인 스토리뷰 보러가기: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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