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떤 기자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판검사 대열에 끼지 않고 신문 편집기자를 선택했다. 그분은 두고두고 이 일을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편집국의 심정적 서열을 살펴보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편집기자는 취재기자나 취재부서와 비교하여 '을'에 가깝다. 업무가 그렇기 때문이고, 날마다 떵떵거릴 만한 공로를 세워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그 공로가 기록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편집기자는 신문에 이름이 나가지 않는 영원한 무명용사이다. 언론사의 어떤 선배는 나를 두고 편집에 있기는 아깝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취재로 나가면 재능을 발휘할 사람이 무슨 고집으로 거기 앉아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근을 ‘3신 할멈’ 즉 등신, 병신, 귀신으로 보는 오래된 관점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편집기자는 하나의 '뒷배경'이 있다. 아랍의 투사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자살테러를 벌이는 까닭을, '정신'이나 '신념'을 비웃는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어렵다. 인간은 욕망과 이익에 죽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치와 명분에 죽고산다는 것을 옛사람들도 이미 파악했다. 공자의 설법이나 석가의 설법이나 주자학의 메아리나 예수의 외침도 그런 것이다. 편집기자는 가치를 먹고 산다. 정말. 날마다, 뉴스 가치를 먹고 살며, 독자의 가치를 먹고 산다. 편집기자가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는 7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편집기자는 바른 말과 바른 생각을 날마다 생각하며 산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문제를 옳게 접근하고 어떤 사건을 바르게 읽어내기 위해 고심한다. 삶을 살면서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모든 문제의 옳고그름에 대해 고민하는 직업이 있으면 말해보라.
둘째, 편집기자는 책임만 있는 직업이다. 모든 공은 남에게 돌리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려고 한다. 마감시간이 늦어도 독촉을 못한 죄, 사건 발생을 예측하지 못한 죄, 더 빠르고 기민하기 움직이지 못한 죄를 스스로 진다. 오탈자가 나도 모두 내 탓이요, 기사의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팩트가 졸렬해도 모두 내가 불민한 탓이다.
세째, 편집기자는 이름을 감춘다. 빛나는 이름은 타인에게 주고 자신은 그를 빛내주기 위한 노동만을 위해 각고면려한다. 천하에 공명심이 없는 존재는 없겠지만 직업상 공명심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 편집기자다. 좋은 기사를 더욱 좋게 만져주고 나쁜 기사를 슬그머니 위장 포장해 좋은 기사로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편집의 숨은 손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네째, 편집기자는 다른 이를 배려한다. 모든 기사는 양날의 칼이다. 아니 여러 날을 가진 칼이다. 그 여러 가지 측면의 날을 검토하여 누가 다치는지 누가 아픈지 누가 부당한 고통을 받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심지어 칼을 쥔 사람까지도 살피고, 칼을 만든 사람까지도 고려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팩트들은 누군가의 관점에서 파악된 팩트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다.
다섯째, 편집기자는 밤을 새는 일을 밥먹듯이 한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만나고 싶은 사람을 위해 졸음을 쫓으며 신문을 만든다. 그보다도 더 좋은 신문을 만들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내일은 더 나은 언론을 꿈꾸며 통음하느라 밤을 샌다.
여섯째, 편집기자는 남들이 걱정하지 않는 큰 것을 걱정하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인류를 걱정하고 조국을 걱정하고 아시아를 걱정한다. 또 100년 뒤를 걱정하며 1000년 뒤까지도 가끔 걱정한다. 포유류의 장래에 대해서도 고심하며 심지어 생명 일반의 최후에 대해서도 괴로워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큰 것만이 아니라 작은 것, 풀꽃 한 송이, 아침 출근길의 체증, 한 대졸자의 미취업의 고민, 혹은 마약중독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등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세세하고 자잘한 문제들까지 고민을 함께 하는 존재다. 이러는 사이 자기 걱정은 언제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일곱째, 편집기자는 소통을 스스로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해 불능의 사회와 엔트로피와 잡음의 세상에서 그래도 스스로 이야기를 쉽게 하고 재미있게 흥미있게 하여, 모든 이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이다. 고독한 사람을 세상으로 끌어내고 상처받은 사람을 다독이며 힘센 사람의 독주나 횡포를 견제하면서 골고루 평등하게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편집기자가 지닌 이런 특징들은 대개 신성하고 거룩한 존재가 하던 일의 대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랑시스 잠은 선한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를 하며 시를 썼다. 그가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이 선한 편집기자와 천국에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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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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