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소득이 높고 불공정한 사회보다는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공정한 사회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다." 한 유명인이 했다는 이 훌륭한 말은 현실에서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소득만 높을 수 있다면 공정함 따위는 무시되는 분위기에 사회가 휩쓸리기 일쑤다.
온 나라가 규제를 없애는 데 심취해 있는 지금,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기울였던 노력들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대형마트 영업시간을 규제했으며,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사회만은 만들지 말자며 주식회사병원 설립을 제한했다. 건설현장의 까다로운 규제는 속도보다 안전을 위한 것이고, 성장의 끝이 공멸이 되지 않도록 환경규제를 촘촘히 쌓았다.
규제의 불가피성을 들며 박근혜 대통령의 혁신 의지를 꺾어보자는 뜻은 없다. 말 그대로 불필요하며 과도한 규제를 없애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기본 취지에 백번 공감한다. 대다수 언론과 전문가들의 생각도 같으니 박 대통령의 말대로 '암 덩어리 같은 규제를 진돗개처럼 물어서 아주 그냥 쳐부수자'는 주장에 한 목소리를 더하는 건 거의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진다.
지난 월요일(17일)로 예정됐던 규제혁신장관회의가 20일로 전격 연기된 것은 규제개혁에 소극적인 관료집단을 향한 박 대통령의 경고다. 다소 혼선이 생기고 비난을 듣게 될 지라도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는 절박함이 투영된 결정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히 교육이나 의료, 관광, 금융 등 서비스분야에서 대대적 규제완화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려되는 것은 관료들의 다음 행보다. 바짝 긴장한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흡족해 할 만한 보고서를 두껍게 만들어 청와대로 들어올 것이다. 규제완화에 소극적인 것도 문제지만 과잉이 가져올 재앙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규제는 무조건 때려잡아야 할 '악(惡)'으로 규정돼 버린 지금, 규제가 사라진 곳에 싹 틀 불공정함을 지적할 참모는 그 회의장에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돈과 권력이 소수에 집중돼 있는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약자다. 좋은 규제는 공공의 이익을 지키며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한다. 권투시합의 규제가 사라지는 순간 플라이급 선수는 목숨을 걸고 헤비급 선수와 만나야 한다. 이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관료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뿐인 규제를 없애고 행정편의에 빠져 버린 관행적 규제를 없애는 정부를 응원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마련된 규제마저 도매금으로 취급받는 건 아닌지 감시해야 한다. 두 작업은 어느 한 쪽을 방해하거나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지해야 할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느 대통령은 전국의 전봇대는 모조리 뽑아버릴 기세로 규제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정한 사회를 가속화 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자 임기가 끝날 무렵 방향을 급선회했다. 동반성장 같은 말은 이때 유행했다.
그는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너무 늦은 명언을 남겼다. "소득이 높고 불공정한 사회보다는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공정한 사회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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