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4)
옥도끼로 찍어내어 세 자(尺)로 재단하니, 위 중간 아래에 천지인이 모였도다
내허외실하야 음양을 배합하니, 세 양은 위에 있고 두 음은 아래 있다.
등 부분의 둥글기는 둥근 하늘 닮았고, 배 부분의 모나기는 모난 땅을 닮았다
하늘에 남는 것은 하늘에 없는 서북(西北)이요, 땅에 남은 것은 땅에 없는 동남(東南)이라.
푸른 실로 끝을 이어 늘여서 받친 모양, 단양의 벽오동 가지에 봉황꼬리 깃이로다
큰 줄은 농롱하여 늙은 용 울음이요, 작은 줄은 냉랭하여 신선학의 소리로다
궁상각치우는 다섯 음으로 벌어지고 수화목금토는 사계절을 맡았다
제1은 각이니 나무(木)의 봄소리라, 봄바람 꽃피는 날 두견의 소리로다
제2는 치니 불(火)의 여름소리라, 남산 소나무 가지에 공작의 소리로다
제3은 상이니 쇠(金)의 가을소리라, 서풍 백제성의 외기러기 소리로다
제4는 우이니 물(水)의 겨울소리라, 북수 장강의 여울 우는 소리로다
제5는 궁이니 흙(土)의 수컷소리라, 춘추 전국시에 땅이 흔들리는 소리로다
금보가는 퇴계가 단양(옛 이름 단산(丹山))에서 거문고의 모양과 유래, 음조의 특징을 천지운행과 음양오행으로 풀어낸 128행의 긴 노래이다. 그는 단양에 온 이후 두향의 거문고에 심취하여 그 형상을 음미하고, 아름다움을 이루는 음률들을 해석하여, 철학적으로 풀어나갔다. 금보가를 퉁기는 두 사람을 보며 공서는 감미로우면서도 광활한 예술의 세계를 깊이 맛본다. 소리를 읽어내는 퇴계의 예민한 귀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시인의 솜씨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공서는 저절로 소동파(蘇東坡)의 '거문고시[琴詩]'를 중얼거렸다.
"약언금상유금성(若言琴上有琴聲)이면,
거문고 소리가 거문고 위에서 나는 거라면
방재갑중하불명(放在匣中何不鳴)인가,
그냥 두면 통 속에서 왜 소리가 나지 않는가
약언성재지두상(若言聲在指頭上)이면,
거문고 소리가 손끝에서 나는 거라면
하불우군지상청(何不于君指上聽)인가,
어찌 그대 손끝에선 그 소리가 안 들리는가"
두향이 가만히 말했다. "공서어른이 읊으신 동파시(詩)에 거문고와 사람의 내밀한 호응이 숨어있는 듯하옵니다."
공서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이자, 퇴계가 두향에게 그 시의(詩意)를 풀어 설명했다.
"그렇구나. 거문고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거문고 통 속에도 있지 않고, 사람의 손끝에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겠느냐. 금인지간(琴人之間ㆍ거문고와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인데, 거문고와 사람만 있다고 소리가 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거문고의 줄이 제대로 잡혀 있고 사람의 손끝도 오랜 연습과 경험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거기에 그 둘을 아우르는 흥(興)과 그것을 들어주는 귀가 있어야 하느니라. 거문고가 그저 소리를 내는 단순한 통이 아닌 것이 바로 그 점에 있지 않겠느냐. 그 속에 사람이 있고 그 속에 마음이 있으며 그 속에 뜻과 욕망과 시(詩)와 지음(知音)이 있으니, 그것이 인간 천년의 벗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아아, 정녕 그러하군요. 음악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율려(律呂ㆍ음을 나누는 원리)의 진상을 여기서 만나는 듯합니다. 율려는 12개율을 6개의 양률과 6개의 음려로 나눈 것이라 들었습니다. 주역의 음양 철학과 상생상극의 원리가 음악 이론과 만난 셈이지요. 우리의 귀를 깨끗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란 바로, 조화와 상생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인(古人)은 이 음률의 개념으로 쓰이는 율려가 세상을 창조한 하늘님(天)이었다고 말했지요(박제상의 '부도지'). 율려가 별들을 만들고 우주의 모성인 마고(麻姑)를 만들었다 하더이다. 마고는 이 땅을 창조한 뒤 하늘이 전하는 본음(本音)으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음악 하늘님의 후손이 아니겠습니까. 거문고 여섯 줄과 가야금 열두 줄은 바로 하늘의 본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계속>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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