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사람은 누구나 정해진 자리가 있다. 나는 머리칸에 속해 있고, 당신들은 꼬리칸에 속해있다. 당신들의 자리를 지켜라." 지난해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기차 칸에 따라 사람들의 계급이 구분된다. 제일 핍박받는 꼬리칸 사람들이 앞칸을 향해 직진해나가지만 이내 '자리를 지키라'는 압력과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런 설국열차의 풍경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으로 대변되는 신계급사회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도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해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갑을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은 '말'을 통해서다. 작년 5월 남양유업 30대 영업직원이 40대 대리점주에게 폭언과 막말을 한 녹취파일이 고스란히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퍼져나갔다. '갑'의 입장인 본사 영업직원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대리점주에게 초지일관 반말을 일삼은 건 물론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쏟아냈다. '을'은 자신의 사정을 빌거나 갑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갑과 을의 철저한 계급관계가 우리 사회의 상식적인 관행과 정서마저 뛰어넘고 있는 모습이 갑을공화국의 비틀어진 단면이다. 이번 '말(馬)의 해, 말(言)의 해'에서는 갑의 폭언과 을의 극존칭, 이 '말'의 양극화에 대해서 다뤄본다.
◆ 반말+욕설+막말 '갑의 말 3종세트' = "물건 못 받는다고?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알아서 해. 죽여버린다. 진짜..." 지난해 유튜브에 올라온 남양유업의 이 짧은 녹취록을 시작으로 사회 곳곳에서 갑의 횡포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우선 남양유업의 사례처럼 대다수 갑의 말은 반말로 시작한다. 상대방의 나이나 연차에 대한 고려없이 오로지 계약서 상의 갑-을 관계에만 초점을 맞춘다. 자연스럽게 욕이 등장하는 것도 빈번하다. 작년 4월에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상무가 기내에서 '라면 맛이 형편없다'며 승무원에게 욕설을 해 '라면 상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곧 이어 지난 10월 공개된 녹취록에서는 아모레퍼시픽 영업팀장이 대리점주를 불러내서 "나이 마흔 넘어서 이 XX야? (다른 대리점에) 뒤지면 되나, 안 되나?" 등 50분에 걸쳐 폭언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막말'로 대변되는 갑의 횡포는 비단 계약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주거나 지불하는 쪽이 '갑'이다. 서비스종사자들에겐 소비자들이, 취업준비생들에겐 기업이, 아르바이트생들에겐 고용주가 '갑'이다. 일부 갑들의 언어폭력은 대부분 왜곡된 권위의식에서 나온다. 최근 5년간 국내 항공기 승무원에 대한 폭행 및 폭언 사건은 총 101건으로, 그 중 폭언이 87건에 달했다. 백화점 판매직과 콜센터 직원 등 감정노동직군 22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욕설 등 폭언을 들었다고 말한 응답자가 81%나 됐다. 서울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비정규직 김 모(48)씨는 "나이도 어린 행정실 정규 직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커피 타와라', '밖에 나가서 간식을 사와라' 등 명령조로 얘기할 때는 기분이 많이 상한다. 하지만 괜히 분위기를 망치거나 인사에 영향을 줄까봐 싫은 티도 못낸다"고 하소연했다.
법률용어일 뿐이었던 갑과 을이 어느새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드러내는 용례가 된 현 상황을 두고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갑과 을의 나라'에서 "갑은 군림하고 을은 비위를 맞추는 갑을문화는 개발경제 시대를 거치면서 나온 뿌리 깊은 병폐"라고 주장한다. 갑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슬로건을 심리적 면죄부로 일삼고, 을은 '나부터 살고 보자'며 체념의 지혜를 터득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같은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갑을관계를 부채질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 "고객님, 이 옷은 품절되셨습니다." 사물에도 존칭을 ='갑'에게 모든 것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을'의 '극존칭'이다. 서비스업종에서 시작된 '극존칭'은 커피 매장, 백화점, 휴대폰 판매점, 홈쇼핑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 화장품에는 수분 보습 기능이 포함되셨습니다", "고객님, 이 옷은 품절되셨습니다" 등 사물에까지 존칭 어미인 '시'자를 붙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기도 수원에서 가전제품 대리점을 하는 신현호(37.가명) 씨는 "사물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 손님들이 불쾌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잘못된 줄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다. '결제금액 5만원이십니다'라고 말할 때와 '5만원입니다'라고 할 때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외환위기 이후부터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비스종사자들 사이에서 존대 말투가 시작됐다. 이를 빨리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오랜 시간 침묵해야 했던 '을'들의 말이 공격적이고 선언적인 경향을 보일 때도 많다. 회사를 대상으로 한 노동조합의 구호나 게시판 곳곳에 붙여져 있는 대자보의 문구들이 대표적이다. '00가 아니면 죽음을', '보상하라', '사죄하라', '반드시 승리하자' 등 투쟁적이고 비장한 말투는 을이 처한 처지를 그대로 대변한다. 하지만 소통의 측면에서는 이 역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영일 공공소통전략연구소 대표는 "'을'들은 그동안 억눌려왔기 때문에 어법 자체에 불만이 섞여있다. 이 과정에서 갑의 언어와 을의 언어가 수렴해나가지 못하면서 상호간의 충돌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갑의 말, 을의 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때문에 이들의 상생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말을 점검해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최영일 대표는 "사회 연결망 속에서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말의 권위와 어법이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유일한 방법이 소통이다. 소통을 통해 서로 간 신뢰관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말들, 속내를 털어놓는 과정을 한 번 이상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갑과 을은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과도적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소통해야 한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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