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갑오년(甲午年)'이다. 잠깐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인 1894년(고종31년), 그때도 갑오년이었다. 이 해 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녹두장군' 전봉준 등이 이끈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부패와 비리를 참다 못해 무장봉기를 했다. 조선 조정은 5월 농민군 진압에 나섰지만 장성에서 패퇴한 데 이어 전주까지 함락되자 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 군사 2800여명이 충청도 아산에 도착하자, 일본이 '일본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은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켜 곧바로 서울로 진군했다. 6월 한 달 동안 8000여명의 일본군이 서울과 인천에 집결했다. 조선 조정이 일본 파병에 놀라 '즉시 철병'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청에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안한 뒤 청이 이를 거절하자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행했다.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공격해 불법 점령하고, 흥선대원군과 김홍집 등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8월 일본은 조선 조정에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하도록 권고했다. 갑오경장은 서양식 법과 국가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고 신분타파, 통화정리, 도량형 통일 등 정치·경제 개혁이 뒤따랐다. 동학농민군은 10월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쟁을 펼치기 시작했고, 12월 초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데 이어 전봉준·김개남 등이 24일 체포됐다. 이듬해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을 더욱 노골화 했다.
그때로부터 또 120년전인 1774년(영조50년), 영조의 개혁정책이 무르익을 시기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얼마 뒤인 1730년,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노론(老論)의 강경파 영수 민진원과 소론(少論)의 거두 이광좌를 불러 두 파의 화목을 권했다.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 소론의 조문명을 우의정에 임명해 당파를 초월한 소위 '거국내각'을 꾸리기도 했다.
뿌리깊은 당파 대립은 사도세자 사건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눠졌다. 사도세자를 두둔해 시파로 불린 남인(南人)들은 과거에 합격해도 이를 취소하는 바람에 수십년 동안 과거의 응시를 거부했고, 이인좌 등 과격파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조가 탕평책을 계승해 그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하고 노론·소론뿐만 아니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다시 갑오년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정치권은 이념·지역갈등과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신(新)당쟁'이라 할 만하다. 밖으로는 북한체제 불안과 함께 중국과 일본이 다시 군사적으로 맞서고 있다. 청일전쟁 직전과 비슷하다. 주변 열강의 입김에 휘청이던 조선말기에도 위정자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에 바빴다. '신(新) 갑오경장'을 강조한 이 땅의 지도자는 명성황후나 흥선대원군의 전철을 밟을 지, 영조나 정조를 따라갈 지 궁금하다.
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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