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 지난해 8월 검정을 통과한 8종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정부의 강제 수정명령에 반발한 6종 교과서 집필진이 교육부를 상대로 제기한 수정명령 집행정지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날로 채택이 마무리된 한국사 교과서의 학교를 대상으로 한 배포 절차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심준보 부장판사)는 30일 천재교육, 두산동아, 미래엔, 금성출판사, 비상교육, 지학사 등 6종 집필진들이 제기한 수정명령의 효력 정지 신청을 기각하면서 "저작자들의 저작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해 수정명령의 효력 등을 정지해야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오히려 수정명령의 효력 등을 정지할 경우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4개월 전인 지난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육부는 8월30일 검정통과한 8종 교과서 가운데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사실오류와 편향성 논란이 크게 불거지자 8종 모두에 대해 수정방침을 정한 뒤 1차로 수정권고안을 발표했으며 이에 각 출판사와 집필진들은 정부안과 자체 수정안을 마련해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는 그러나 11월 29일 리베르스쿨을 제외한 교학사와 7종 교과서에 대해 수정명령을 내렸으며 교학사를 제외한 6종 교과서 집필진들은 이에 반발해 지난 3일 서울행정법원에 교육부의 수정명령에 대한 취소소송, 교육부의 수정명령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6종 출판사는 집필진과 별개로 수정명령에 따른 수정본을 정부에 제출했고 정부는 기존 2종을 포함한 8종 모두에 대해 최종 승인 결정을 내렸고 소송이 진행 중인 과정에서 이달 말로 예정된 일선 학교를 상대로 한 채택절차를 진행해왔다. 법원이 집필진들의 손을 들어줬을 경우 그간의 교과서 수정권고안과 수정명령 등의 절차가 모두 무효화되고 교과서 채택일정도 중단된다.
6종 교과서 집필진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정부의 수정명령과 이와 관련된 절차에 위법성과 위헌성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수정명령이 취소돼야 하며 수정명령에 대한 효력도 정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수정명령의 법적 근거는 대통령령인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제26조 제1항인데 이 조항은 모법인 초ㆍ중등교육법이 하위법에 위임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음이 명백한 만큼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위배되며 ▲정부의 수정명령이 사실상 '수정'의 정도를 넘어 특정 사관의 반영을 강요하는 등 실질적으로 교과서 내용의 변경을 요구하는 데 이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애초 거쳤던 검정절차에 준하는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함에도 수정명령을 통해 검정제도의 취지를 훼손하거나 잠탈(규제회피)할 수 있으며 ▲ 교과용도서심의회의 심의 등 적법한 검정절차를 거쳐 검정의 합격결정을 받은 자의 법률상 이익을 쉽게 침해할 수 있다는 등을 주장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그러나 "수정명령으로 말미암아 신청인들이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일부 내용이 그 의사에 반해 바뀌는 등 어느 정도 불이익이 있다"면서도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하면 수정명령이 명백히 위법하다고 단정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현 단계에서 신청인들의 저작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해 수정명령의 효력 등을 정지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효력 등을 정지할 경우 공공복리에 중대할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법원이 제시한 여러 사정들을 보면 ▲수정명령의 직접 상대방인 출판사들이 신청전에 정부에 수정, 보완대조표를 제출했고 ▲주로 문제 되는 근현대사 관련 수정사항이 출판사 별로 3~6건에 불과하며 ▲2014학년부터 한국사 과목은 최소 2학기 이상 수업을 편성해야 하므로 근현대사 부분에 대한 수업이 이루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 등이다.
법원은 또한 ▲교과서가 통상의 저작물과 반드시 같다고 볼 수 없고 ▲수정명령 존재와 내용이 이미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지고 첨예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돼 학생, 교사, 학부모도 해당 교과서가 신청인들이 당초 집필한 대로 제작, 배포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아울러 수정명령의 효력 등을 정지해도 이미 수정명령을 이행한 발행자(출판사)들에게 수정명령을 반영하지 아니한 채로 교과서를 발행해 배포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향후 교과서의 발행, 채택, 배부와 관련해 전국 각지의 교육현장에서 심각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그러나 "이 결정은 집행정지의 요건 충족 여부만을 판단한 것이므로 수정명령의 적법 여부에 대해서는 향후 본안소송에서 면밀한 심리와 심사숙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혀 수정명령의 적법성에 대해서는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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