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명사이지만 '살다'라는 말이 그냥 슬그머니 뭉쳐져 서있는 말이다. 죽음이란 말도 그렇다. 꿈을 꾸다 할 때 꿈이란 말도 그렇고 잠을 자다 할 때의 잠 또한 그렇다. 이런 말들은 왜 그 상태를 가리키는 고유한 말이 없이 동사를 그냥 멈춰 세워 명사가 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을 내 마음대로, 명동사라 부르기로 했다.
동사가 그냥 명사가 돼버린 것은 명사이긴 하지만 그 내면 속에 동사가 지닌 움직임이 한가득 소용돌이치고 있다. 삶은 한 글자로 되어있지만 그 속에 출렁이는 '살다'의 동사가 만들어내는 파란만장이 짧은 명사를 심오하게 만든다. 간단하지 않은 내면을 딱 한 글자로 뭉쳐버린 '삶'이란 외자의 단호함은 역설 같아 보이기도 한다.
죽음이란 말은 왜 이리 부드러운가. 살려고 태어난 인간이 죽어야 하는 치명적인 모순을 우린 이렇게 부드럽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가. '죽다'라는 말은 지금 막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어 없어진 상태 전부를 포함하는 말이다, 그래서 삶보다 죽음이 더욱 길다. 나는 태어날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잠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 낱말이 이미 그렇지 않은가. 죽음들은 하늘의 별처럼 가득하고 반짝거려 역사책을 만들고 이야기책을 만들고 예술을 아로새겨 놓았다. 죽음들은 기억과 기록과 전승으로 오랫동안 반짝인다.
잠이란 말은 '자다'를 그냥 웅크려버린 말이다. 잠은 하루의 낮 동안 깨어있는 육신을 잠깐 죽여 쉬게 하는 일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베푼 유일한 배려가 '잠'일지 모른다. 죽음은 잠과 같으니라. 활동하는 생명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것이다. 잠은 다시 네 육신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죽음은 네 육신을 그만 쓰고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이니라. 그 예행연습을 거쳤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인간은 죽음 같은 잠에도 로맨스를 불어넣었다. 사랑을 하는 일을 같이 잠잔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잠드는 일은, 사실은 잠이 아니라 그 앞에 깨어있으면서 하는 일이 핵심이지만 슬그머니 잠에 붙여 우리는 그 일을 얼버무려 놓았다. 잠은 사랑이며 생명을 잉태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니, 죽음을 외삽시켜놓은 절대자와 새 삶을 만들어내는 창조를 겹쳐놓은 인간이 '잠' 한 글자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꿈이란 말은 '꾸다'에서 왔지만, '꾸다'는 다른 동사(살다, 죽다, 자다)보다 의존적이다. 그냥 '꾸다'로만 쓰지는 않는다. '난 어젯밤 아버지를 꾸었다'라고 하지 않는다. '꾸다'는 꿈이라는 말이 그 앞에 붙어 한 번 더 읊어줘야 한다(꿈꾸다). 꿈은 잠을 자는 동안 상영되는 영화인데, 의도하거나 초청한 것은 아니다. 그냥 스스로 찾아와 영사기를 돌리고 간다. 무슨 뜻인지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가 더 많다. 왜 그런 '스토리텔링'을 잠 속에서 펼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은 잠 속의 꿈을 빌려, 깨어있는 동안에도 '꿈꾸다'라는 개념을 확장해 쓰기 시작했다. 그 꿈은 앞으로 무엇인가를 하거나 이루겠다는 의지나 의욕을 품는 것을 가리킨다. 잠 잘 때의 꿈과는 전혀 다른 일인 데도, 우린 별 갈등없이 망(望)자 붙는 여러 가지의 동사(희망,소망,갈망,대망,야망)들을 꿈이라는 말 속에 포함시킨다. 작은 죽음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관은 신이 만들어준 것이고, 삶 속에 눈 뜬 채로 상영되는 미래공상과학 영화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둘 다 꿈이지만, 앞의 꿈이 이뤄지면 그것은 선몽일 뿐이고, 뒤의 꿈이 이뤄지면 그것은 성취나 성공이다.
명동사의 말들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쓰는 표현들이다. 그런데도 고유의 명사 하나 만들어놓지 않은 것은, 인간이 바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명사 속에 들어있는 동사적 성질을 늘 음미해야 하는 말이기에 그 말 속에 들어앉는 것이 가장 적절했을 것이다. 명동사는 절실하며 심각하다. 치명적이기에 아쉽고 아름답다. 어느 것이든 생략할 수 있는 건 없다. 저 네 개의 명동사 중 하나만 없더라도, 우린 지금보다 훨씬 느긋하고 평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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