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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산초 열매를 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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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山椒) 열매를 절인 반찬을 얼마 전 음식점에서 맛보았다. 추어탕에 산초가루를 뿌려 저어 먹긴 했어도, 산초 열매를 통째로 먹기는 처음이었다.


산초를 깨물어 혀에 얼얼한 느낌이 번지는 동안 초림(椒林)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침 식사 자리에서는 조선시대 역사가 화제로 오가고 있었다. 초림은 서얼(庶孼)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庶)와 얼(孼)은 모두 서자를 뜻한다.

초림은 사림(士林)과 대비되는 말이다. 사림은 유학을 신봉하는 조선 지배계급이었고, 서얼은 관직에 오를 기회가 박탈됐을 뿐더러 자식으로도 형제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서얼을 왜 초림이라고 했나? 서얼은 평생 얼얼한 자기네 삶을 곱씹으면서 맛이 얼얼한 산초를 떠올렸고, 그래서 산초의 초를 따서 스스로 초림이라고 불렀다. 서얼을 가리켜 '한 다리가 짧다'고도 말했다. 한 다리가 짧다는 건 모계를 비유한 말이다.

넉점박이도 서얼과 동의어였다. 서(庶) 글자에 점이 넷 있으니, 이 글자가 찍힌 처지를 넉점박이라고 한 것이다. (홍명희, 적서(嫡庶), 조선일보 1936.2.21) 요즘 사전에서는 넉점박이를 '두 눈과 코, 입의 네 구멍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는데, 이는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갖다 붙인 설명이다.


서자 차별은 조선이 가장 심했다. 근대 이전에는 대개 신분사회 아니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 초기만 해도 아버지가 고위 관료이면 서얼이라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점차 서얼 차별이 심해지면서 과거 응시 자체가 막혔다. 서얼은 무과나 잡과에나 응시가 가능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이 받들어 모신 중국에도 그런 악법은 없었다.


조선에서 서얼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다산 정약용 등 소수에 머물렀다. 임금이 서얼허통을 하려 했지만 적자 신하들의 반발에 막히곤 했다. 조선은 차별이나 편가르기를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한 사회였다. 사색당쟁도 같은 맥락에서 빚어졌다.


한국사 교육이 강화된다고 한다. 한국사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밝은 부분과 함께 위와 같이 어두운 부분을 가감없이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것처럼 역사를 역사로 공부하는 길이다.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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