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일본이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당했을 때 일본 국민들의 차분하고 질서 있는 모습이 국내 언론에 소개됐다. 이를 전하는 일부 언론은 엄청난 재난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길게 줄지어 선 일본 국민들의 모습, 재앙 앞에 담담한 듯한 그 태도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양순한' 태도가 일본에 천재(天災) 이상의 인재(人災)를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일본 국민들은 자신을 속이고 사고를 은폐하는 이들을 향한 분노가 별로 없었다. 정부와 원전당국에 성난 얼굴로 노(怒)하지 않고 '노(No)'라고 하지 않는 관대함, 그것이야말로 재난을 더욱 키우고 되풀이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아무리 큰 부를 일구더라도 가난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빈곤은 시민으로서의 의식, 양식의 빈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원전정책에 대한 일대 반성이 일고 있는 반면 정작 일본 자신은 '초연'한 이유, 비상식적인 망언을 일삼는 극우 정치인들이 높은 지지를 받는 배경, 제 아무리 경제대국이 되더라도 일본이 '2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최근 일본의 한 참의원이 원전사고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를 천왕에게 전달했다가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감히 불경하게도 '천황님'께 편지를 전할 수 있는가라는 국민감정이 빚어내고 있는 소동인데, 나는 다시 한 번 일본 사회의 빈곤을 확인했다. 한국은 이런 점에 관한 한 일본보다는 더 진보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의 경제력을 부러워하면서도 신민이 아닌 한 인격으로서의 자립과 자존, 권리의식에 있어서는 분명 일본보다 앞선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며칠 전 대통령이 순방 중인 외국의 어느 나라의 교포들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인 것을 놓고 여당의 한 국회의원이 "(불경하게도 외국에서 국가원수를 비방하는 시위를 하다니)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혹시 양순한 국민, 순종적인 국민이어야 국민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방사능 공포로 생선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방사능은 참 무서운 것이지만 방사능처럼 무서운 것이 또 없는 건 아니다. 일본의 양순한 시민의식이 위험한 것처럼, '불경의 대가' 운운하는 이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는 현실이라면 그건 방사능 생선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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