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커피숍에 들어갔을 때가 일요일 오전 11시쯤. 우리는 이미 두 시간 넘게 걸었고 약간 허기진 상태였다. 11월 초니까 겨울은 아니었지만 전날 찬 가을비가 길게 내린 탓인지 바람이 거셌고 쌀쌀했다. 아이스커피보다는 핫커피가,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야외 테이블보다는 따뜻한 실내가 더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내가 커피를 주문하는 사이 아내는 실내를 둘러보며 자리를 탐색했는데, 어딘가 앉지 않고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여기 개그맨 H가 와 있다, 저 쪽에 앉아 있어." "…." "개콘에 나오는…." "…." 심드렁한 내 반응에 아내는 멀쑥한 표정으로 물러났고, 나는 다시 커피주문에 몰입할 수 있었는데(아, 인생이란. 그 때까지 만해도 개그맨이 오늘의 주인공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아내를 찾아보니 젊은 남녀 넷이 왁자지껄하는 테이블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실내가 넓어 한적한 곳도 많은데 뜻밖이었다(내 외모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녀는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죽~ 나를 군중과 격리시키려 노력하고 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넷 중 하나가 바로 H였다(수치심보다 호기심이 더 강한 인간본능이란 걸 깨닫는 순간이다!). TV를 보면서 '개그맨치곤 꽤 깔끔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직접 보니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나누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앞에 앉은 여인의 신경은 온통 옆 테이블로 건너간 게 분명했다(같이 산지 20년이 넘었는데 그걸 모를까). 가족끼리는 하품도 전염된다고, 나까지 옆자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잠깐잠깐 슬쩍슬쩍 그의 말투와 용모를 뜯어본 뒤 '나와 다른 우월한 종족'이라 결론지었다(나이, 용모, 옷맵시는 물론 또래 여자를 대하는 자신감이 나를 한없이 주눅 들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나에 절망하고 있는데, 나와 그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유레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그가 자세를 바꾸면서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떠는 것이 아닌가(따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아주 많이 그리고 자주 떨어본 익숙하고 능란한 솜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여보, 저것 좀 봐"라고 외치려는데 H가 슬며시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1분쯤 지났을까, 비로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아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제발 좀, 밖에 나와서는 다리 좀 떨지 말라니까."
<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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