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고독한 길을 택했다.
그는 '군주론'을 구상하면서 홀로 나아갔다. 그는 '군주론'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를 논한 바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어느 누구도,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도 다르다"고 말한다.
'군주론'은 유럽에서 성경 구절이나 옛 성현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책으로는 1000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루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의 고독'에서 "기독교적 전통과 인간주의라는 모호한 관념론에 의해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주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마키아벨리는 이 모든 지배적 관념과 단절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가통치에 관한 15년간의 연구를 집약해 1513년에 '군주론'을 탈고한다. 그러나 그와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마키아벨리는 사후에는 오해와 비난 속에 외로운 존재였다. 그는 모든 음흉하고 비열한 정치적인 행위의 '배후 인물'로 지목됐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반 마키아벨리론'에서 "정치가는 도덕을 존중해야 하는데 '군주론'은 악덕을 권한다"고 비판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군주, 특히 신생 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사악함으로는 진정한 영광을 얻을 수 없다"며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라고 조언했다.
우리는 그가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은 수단이었다. 그의 바람은 외세에 짓눌린 이탈리아와 인민이 도탄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롬바르디아에서 자행되는 약탈 및 나폴리와 토스카나 왕국에서 일어나는 착취행위에 종지부를 찍고,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혀온 고통을 치유해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며 메디치 가문에 이 사명을 떠맡을 것을 촉구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지 500주년을 맞았다. 그를 '마키아벨리안'이라는 굴레에서 풀어줄 때도 됐다.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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