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서울 중구 초동 거리에는 함박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소담스럽게 꽃이 피어난다. 이팝나무 꽃이다. 이팝나무 꽃은 스무날 가까이 은은한 향기를 뿌린다. 질 때도 눈처럼 흩날린다. 흰 꽃이 지고 나면 녹색 잎 사이로 앵두만한 짙은 남색 열매를 매단다.
초동 길가의 이팝나무 사이엔 몇몇 다른 수종(樹種)이 있다. 회화나무도 그 중 하나다. 회화나무는 명보아트홀 앞에 서 있다. 모습이 점잖은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리며 영어 별명도 스칼라 트리(scolar tree)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상서롭게 여겨졌다. 중국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후, 그리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날 때 기념으로 회화나무를 심었다. 우리는 궁궐, 서원, 문묘, 양반집 뜰에 심었다.(박상진, '궁궐의 우리 나무')
자태가 품위 있고 아름다운 회화나무와 이팝나무는 가로수로 제격이다. 회화나무 가로수는 압구정동에서 볼 수 있다. 이십여년 전 압구정동에서 회화나무를 처음 보고, 그때는 이름을 몰랐지만 참 정취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초동에서도 만나게 되니 반갑다.
강남고속터미널 네거리에서 서울교육대학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칠엽수가 헌칠하다. 칠엽수는 마로니에라는 서양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라는 노래가 한때 많이 불렸다. 대학로에 마로니에공원이 있고, 마로니에공원에는 마로니에가 서 있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가로수도 마로니에라고 한다.
넓은 길에 심어진 키 큰 가로수 중 하나가 플라타너스다. 우리말 이름은 버즘나무다. 몸통이 버짐 핀 얼굴처럼 얼룩덜룩하다. 가을에 잎이 물들고 지는 모습도 다른 나무에 비해 멋이 덜하다.
겨울이 되도록 칙칙한 빛으로 나뭇가지에 붙은 플라타너스 잎을 보면서 '다른 나무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하곤 했다. 플라타너스를 대신할 후보로 팥배나무를 추천한다. 줄기가 단정하고 늦봄에 흰 꽃이 무리지어 피고, 가을엔 팥만한 작은 배 모양의 열매가 예쁘게 열린다.
가로수가 겨울을 앞두고 잎을 떨군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지만, 요즘엔 이런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난자리는 익숙해지게 되고 날자리가 더 허전함을 안겨준다'고. 잎이 다 진 다음보다 떨어지기 시작하는 요즘이 더 쓸쓸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목(裸木)으로 지낸 뒤의 신록과 꽃이 더 눈 부시게 마련이니….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