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시리즈⑨ 매일 벌어지는 장기·바둑판, 사건도 많고 스타도 많고
4시간째 식음 전폐한 70대 戰士
심심풀이도 지고나면 성을 버럭
'무기' 대여료 2000원, 파고다 최고 볼거리
[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매일 수백건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집니다. 종로 한복판 3만9669㎡(약 1만2000평)의 종묘광장공원이 일순간 전쟁터로 변하는 것인데 전장은 바로 가로 42㎝×세로 45㎝(한국기원 정식 규격)의 장기판과 바둑판입니다. 머리가 성성한 65세 이상의 노장들이 참전해 혈투를 벌이는 것이죠. 공원 안에 놓인 장기·바둑판이 줄잡아 백 개. 노장들이 손에 쥔 무기는 장기알과 바둑알이 전부입니다. 곳곳에서 탄성과 탄식이 터져 나오는 '국지전'에서 이들이 전리품으로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입니다. 할아버지들은 각자의 시간을 걸고 싸웁니다. 그런데 이 전투는 보통의 다른 싸움과는 달라 보입니다. 상대방의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목표이자 이 전쟁의 전술인 것이죠. 이기든 지든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 결국 모두 이기는 싸움인 겁니다. 기력이 쇠한 노장들이 하루 대여섯 판도 거뜬한 이유가 바로 이것인가 봅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공원은 250명이 넘는 할아버지들로 가득 찼습니다. 바둑과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는 공원 안에서 강북주차관리소 주변은 특히 북적북적합니다. '탁, 탁'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가봤습니다. 이날은 주목이 심어진 화단 주변으로 바둑판 70여개, 장기판 20여개가 깔려 있었습니다. 한 판에 두 명이 대결하는 것이니 200명 가까운 노장들이 대결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주목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은 이명권(73) 할아버지는 오전 11시부터 점심도 거른 채 4시간째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승부가 나길 기다려 말을 걸자 "이거 두다보면 밥 생각도 안 나"라며 다시 바둑판을 응시했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집은 경기도 역곡. 집을 나서 공원까지 1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지만 주차관리 일을 쉬는 날에는 꼭 종묘공원에 오신답니다. "집에 있으면 시계만 자꾸 보는데 여기 오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하루가 쏜살같다니까."
이따금 "장이요", "멍이요" 소리만 들리던 공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포(包)가 넘어가야 한다니까", "마(馬)가 들어와서 막아야지", "아니지 아니야. 궁(宮)을 틀라고 궁을." 수세에 몰린 장모 할아버지가 선뜻 방어를 하지 못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훈수를 둔 것입니다. 심지어 한 훈수꾼은 직접 말을 옮기기까지 합니다. 이러다 진짜 싸움판이 벌어질 성 싶습니다. 그러나 소란은 장 할아버지가 "가만있어요. 가만. 이래서 동네 장기는 안 돼"라며 '버럭' 하자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훈수꾼보다는 장기꾼이 '왕'인가 봅니다. "졌어요. 졌어." 장 할아버지가 결국 패배를 인정하자 또 훈수꾼들이 "에이 그러니까 내가 상(象)을 먹으라고 하니까","내가 아까 마(馬)를 나가라고 했잖아요"라며 한마디씩 보탭니다. 이상한 건 패장인 장 할아버지의 표정이 밝다는 것입니다. "내가 져줘야 한 번 더 두지. 아직 시간도 많은데."
한편에서는 '빅 매치'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만 10여명. 할아버지들이 빙 둘러 서서 구경을 하는 탓에 밖에선 장기를 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초(楚)나라가 일촉즉발의 패망 위기입니다. 한(韓)나라가 멀리서는 포(包)로, 코앞에서는 졸(卒)로 초나라의 궁을 켜켜이 압박하고 있습니다. 초나라를 잡은 할아버지의 큰 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이때 한 할아버지가 나직이 상황을 전합니다. "저이가 3번 졌데. 1만원씩 했으면 3만원 잃은겨."
도대체 이 장기판과 바둑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궁하면 통하는 법. 이곳 종묘공원에는 소일하는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장기·바둑판을 대여해주는 상인이 3명 있습니다. 공원 가운데서는 바둑만, 공원 오른쪽 주목 아래에서는 바둑과 장기를 빌려줍니다. 상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자리에 앉거나 자리가 없으면 "여기 바둑", 혹은 "여기 장기"라고 외치기만 하면 바로 판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당 1000원씩 총 2000원. 장기건 바둑이건 종목도 따지지 않고 1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시간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한 사람당 1000원씩 받는 아주 간결한 셈법입니다. 여기에 '은박보온재'로 만든 깔개와 요구르트 2개가 함께 제공되는데 서비스치고는 제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만 5년째 바둑판을 빌려주고 있다는 한 관리인은 "많이 나갈 때는 바둑판이 100개, 장기판이 40개도 나간다"며 "한 번 빌리면 점심 먹고 와서도 계속 하시니 하루 종일 두는 것은 예사"라고 전했습니다. 관리인들은 혼자 온 손님과 장기를 두기도 합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가 없는 할아버지들에게는 실력이 비슷한 할아버지를 소개시켜 주기도 한답니다. "다들 시간 보내자고 장기를 두지만 지면 얼마나 성을 내는지. 아주 난리를 부리는 할아버지도 있어. 비슷하다고 소개시켜줬다가 사기 쳤다고 혼난 적도 많아." 파고다공원에서 장기판을 빌려주다가 종묘공원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한 장기 관리인이 일화를 소개합니다.
바둑판과 장기판의 대여 시간은 상인이 출근하는 시간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입니다.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지는 요즘에는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판을 빌릴 수 있습니다. 마감시간을 딱 정해서 매정하게 자르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들이 알아서 판을 정리하고 일어선다네요. 이날도 5시가 넘자 할아버지들이 알아서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내가 오전 8시쯤 나오는데 그 시간이면 벌써부터 나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들이 열 명은 넘어." 사실 일반적으로 공원 내 상행위는 못하는 게 원칙이지만 융통성 있는 법 집행이 그나마 어르신들에게 여유를 제공하는 듯합니다.
알뜰한 할아버지들은 집에서 매번 장기판을 챙겨 오기도 합니다. 공원 안에 나무 밑이나 인근 골목길 캐비닛에 숨겨두는 할아버지도 있답니다. 장기판을 빌리지 않는 할아버지들의 필수품은 신문. 바닥에 깔고 앉는 용도로 쓰는데 구하기 쉽고 휴대도 간편하니 제격입니다. 한 할아버지는 바닥에 깔고 남은 신문지를 돌돌 말아 다시 뒷주머니에 꽂은 채 장기를 두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이 손수 만든 'DIY 장기판'은 합판을 잘라 자를 대고 매직으로 선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놓인 장기판의 균형은 바둑알을 괴어 잡는 기지를 발휘했네요. 잃어버린 졸(卒) 2개는 검은색 바둑알로 대신하는 센스도 있습니다. 매일 바둑판을 집에서 들고 다닌다는 한 할아버지에게 "매일 접히지도 않는 장기판을 들고 다니기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하루에 1000원씩 한 달이면 3만원"이라며 "그 돈이면 술을 사먹겠다"고 혀를 내두릅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다는 게 싸움구경이던가요. 종묘광장공원에 모인 할아버지들 사이에 이것들 못지않게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장기 구경'입니다. 장기도 전투이니 크게 보면 싸움구경의 범주에 들어가겠군요.
공원에 펼쳐져 있는 장기판은 20~30개. 바둑판 수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구경꾼은 두 배 이상 많습니다. 장기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옆에서 훈수 두는 맛인가 봅니다. 두 명 넘게 구경꾼이 있는 곳에는 십중팔구 장기판이 있습니다. 보통 30분이면 한 판이 끝나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하기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딱, 딱' 판과 말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효과음과 "장이요" 소리가 구경할 맛을 더합니다.
남의 경기를 지켜보는 구경꾼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이들에겐 나름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입을 꼭 닫고 장기판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할아버지는 '침묵형 구경꾼'.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이런 침묵형 구경꾼 중에는 아예 휴대용 낚시의자를 펴서 자리를 떡하니 잡고 구경하는 할아버지도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말도 많아지는 법. 구경꾼이 세 명 이상 몰린 장기판에는 장기를 두는 사람보다 더 분주한 할아버지들이 있습니다. 바로 '중계형 구경꾼'들인데요. 이들은 눈으로만 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장기 말의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기 바쁩니다. "상(象)이 넘어갔네", "차(車)로 포(包)를 안 먹고 마(馬)를 잡았네", "차(車) 피한다고 졸(卒)이 양쪽에 있는데 들어갔잖어" 등 중계를 듣고 있으면 축구경기 캐스터가 따로 없습니다. 내친김에 판세를 분석하는 할아버지들도 있습니다. "둘이 엇비슷해보여도 포(包)도 있고 상(象)도 있는 홍(紅)이 좋네. 청(靑)이 아까 포를 안 먹은 것이 크다 커."
중계형 구경꾼보다 더 적극적인 할아버지들은 '참견형 구경꾼'입니다. 이들은 중계는 물론이고 온갖 혼수를 쏟아냅니다. "에이 뭐 하는 거야. 그냥 그거 먹어버려. 아니지, 아니야. 청은 거기 있으면 안 돼. 얼른 도망가야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할아버지가 결국 입을 때기 일쑤입니다. "아이고 시끄러. 동네 할아버지는 여기 다 모였나봐"라며 손을 내젓지만 싫지 않은 눈치입니다. "이거 뭐 어떻게 하라고.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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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20<끝>-④지면을 필름삼아 펜을 렌즈 삼아 다큐 찍듯 썼죠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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