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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한 명의 머리와 만 명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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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한 명의 머리와 만 명의 우주 김도현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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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듣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악독한 선배를 '말리그'(악성종양)라고 부르고, 판사들은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가서 앉아있을 때 '몸배석'이라고 한답니다. 엔지니어들 사회에도 그런 표현이 많다고 들었는데, 경영학 교수들도 가끔 그런 말을 지어냅니다. 아이를 제때 낳는 일을 '생산관리'라고 부르는 식이지요. '조직의 쓴맛'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사조직 분야를 전공하는 어떤 교수가 맘에 안 들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겪은 분들이라면 '조직의 쓴 맛'이 그저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조직은 조직의 구성원들을 움직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의 구성원은 때로 자신의 의지와 반해서 그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직이론은 조직의 상급자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을 몇 가지로 분류합니다. 공식적으로 보면 상급자는 보상을 통해서, 각종 규정을 통해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 징계와 같은 벌칙을 통해서 하급자에게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급자는 공식적인 권력 이외에도 훌륭한 인품이나 수준 높은 전문지식으로 권력을 확보할 수도 있습니다. 하급자는 상급자의 권력행사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복종할 수도 있고, 권력자에 대한 존경심에 근거해 수용할(동일화)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권력자에 깊이 감동하여 그의 생각과 주장을 자발적으로 따를(내면화)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인격적인 매력이나 전문적인 지식에 의한 존경심과 같은 이유로 권력이 행사되는 경우에는 하급자가 자발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지만 금전적인 보상이나 벌칙의 부과와 같은 방식으로 권력이 행사되면 하급자는 그저 '복종'할 뿐이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얼마 전 어떤 권력기관에서 일어난 '항명'에 대한 기사가 넘쳐났습니다. 기관의 내부질서가 엉망이 되었다는 관점의 기사가 적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조금 다르게 볼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조직이론가들은 조직 내부의 갈등이 조직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작은 통증이 큰 병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갈등 해결에 급급하여 진통제를 처방하면 통증은 사라지지만 병은 뒤에서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1000년 전에 이 점을 깨달은 조직도 있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에는 시성(성인 추대)과정에서 반드시 다수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야만 하는 사람(여기서 devil's advocateㆍ악마의 대변인이라는 표현이 유래됩니다)을 선임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등을 조장하여 집단사고를 막아보자는 의도였겠지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좀 더 회의적으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권위에 복종하는 생각없음(thoughtfulness)이야말로 거대한 악의 근원이 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윗사람의 말에 늘 순응하는 조직은 거대한 악의 집단이 될 위험을 떠안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은 매우 약합니다. 특히 거대한 조직과 마주 선 개인은 고유명사가 보통명사 앞에서 얼마나 왜소한지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왜소한 개인이 각각 지닌 사랑, 양심, 믿음과 같은 것들은 적어도 그에게는,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조직이 규정과 벌칙을 휘둘러 개인을 복종시키면 그 조직은 단 하나의 머리와 생각 없는 팔다리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갈등을 지혜롭게 조정하여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면 그 조직은 만 명의 우주를 품게 됩니다. '조직의 쓴맛'에 너무 쉽게 기대는 조직들이 염려스러운 이유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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