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그녀가 하림과 헤어지고 난 그 다음의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설사 이장이 자기를 조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목을 떼놓고 죽네 사네 하는 것까지는 알 리가 없었다.
“우연히 길목 슈퍼에 갔다가.....”
하림이 변명처럼 말했다. 거기서 수관 선생을 만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걸 그녀에게 넌지시 알려준 것이었다.
“참, 소연이 사촌언니는 어떻게 되었나요?”
남경희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하림 대신 수관 선생을 향해 물었다.
“일일구 구급차가 와서 싣고 갔어요.”
수관 선생이 말했다.
“상태는.....?”
“안 좋아요. 병원에 가서 머리 촬영을 해보야 알겠지만....”
“어쩜.”
조금 전까지 장광설을 늘어놓던 수관 선생의 말수가 갑자기 줄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하림의 눈에는 어쩐지 남모르게 퍽이나 다정하게 보였다.
얄궂은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그 순간 이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람 불던 밤의 저수지의 을씨년스런 풍경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녀만은 안 돼! 알겠어? 그 여자만은.....!’
악귀 같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난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어! 그녀가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 내겐 마치 어둠 속에 나타난 빛과 같았지.’
미친 듯이 반백의 머리칼을 날리면서 그날 밤, 운학이 말했었다.
‘처음부터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녀는 도도하고 고상하지. 나 같은 놈이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못 올라갈 나무라 하여 바라보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난 늙고 게다가 한쪽 다리도 절어. 멀쩡한 당신들이랑은 다르다는 것도 알아. 난..... 당신들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아는 것도 없어.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녀는 혼자고, 나도 혼자야. 혼자 사는 늙은 사내가 혼자 사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무슨 문제야? 당신이 이곳에 나타나기 전, 그녀도 분명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 그녀의 집 성경공부에 나를 끌어들인 것도 그녀였어. 그녀는 버림 받은 여자야. 겉은 멀쩡해 보여도 가슴 속은 온통 상처투성이 뿐이지. 알고 보면 동정을 받아야할 쪽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여자야. ”
그러면서 운학은 어두운 허공을 향해 단언하듯이 말했다.
‘누구든 그녀 가까이 가는 놈은 죽여 버릴거야!’
하림은 그 순간 그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랑이란 놈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는 그 열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여자 남경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은 표정으로 지금 허수관 선생의 차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다면 바보 같고 얄밉다면 얄미운 모습이었다.
어쩌면 사랑에 관한 한 여자들이란 대개가 다 그런지 몰랐다. 영리하면서도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양, 때론 멍텅구리 중의 멍텅구리처럼 보이게 하는 독특한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게 여자란 동물인지도 모른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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