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아시아경제에서는 추석 명절을 맞아 그간 기사화된 기획 시리즈 중 일부를 엄선하여 독자 여러분께서 한눈에 보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안전한 귀성·귀경길 되시고 풍성한 한가위 맞으시길 빕니다.
보험범죄(보험사기)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의 강력한 단속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 수법은 갈수록 지능화ㆍ조직화되고 있다. 특히 보험사기는 금전적 피해를 넘어 경제 사회의 근간인 '신뢰'마저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근절돼야 할 사회악으로 꼽힌다. 아시아경제는 총 3회에 걸쳐 보험사기의 심각성을 짚어보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본다.
①공짜 보험금, 한해 4533억 줄줄 샌다
적발금액 5년새 2배 늘어…연루된 사람만 8만3000여 명
갈수록 치밀해지는 수법에 가입자 보험료 인상 덤터기만
#1. 암수술을 받은 후 시내 모 병원에서 후속 치료를 받던 A씨(47ㆍ남). 그는 통원치료를 다녔지만 보험금을 노리고 병원과 짜고 병원에 입원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10개 보험 상품에서 모두 1억8000여만원의 보험금을 타냈다. A씨는 지금 보험사기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2. 보험설계사 경험이 있는 무속인 B씨(26ㆍ여). 그는 지난해 9월 평소 알고 지내던 C씨(35ㆍ여)에게 독초로 달인 물을 몸에 좋다며 속이고 지속적으로 마시도록 해 한 달 뒤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B씨는 사건 발생 전 C씨를 종신보험에 가입시키고 C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 수익자를 본인 이름으로 바꿔 보험금 28억원을 챙겼다.
보험사기에 지급된 보험금과 연루자들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기로 적발된 금액은 4533억원으로, 2007년(2045억원) 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보험사들의 보험금 지급 총액이 29조2486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약 1.5%는 '공짜'로 새나갔다는 얘기다. 이 기간 동안 보험사기 연루자는 3만922명에서 8만3181명으로 2.7배 증가했다.
특히 허위ㆍ과다 입원, 사고내용 조작과 자살ㆍ자해, 상해ㆍ살인, 방화 등 강력범죄를 악용한 보험사기도 2.3%(1925명)를 차지해 보험금을 노린 보험사기의 수법이 나날이 흉포화ㆍ지능화ㆍ조직화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보험사기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는 범죄 증가 뿐 아니라 선량한 보험가입자까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2010년 기준 보험사기로 1년간 새 나가는 보험료가 3조4000억원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보험사기로 가구당 20만원, 1인당 7만원의 보험료를 추가 부담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보험금 누수가 보험료 인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보험범죄가 악성범죄로 분류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보험사기가 지속적으로 나타날 경우 경제 사회의 근간인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보험은 리스크 관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데 사기가 만연하다 보면 불필요한 비용이 소요돼 제도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소비자들이 보험을 들 때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는 것은 물론 보험사들의 심의도 더욱 깐깐해져 보험이 꼭 필요한 사람조차도 가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 보험금을 지급할때 선량한 소비자들까지 무리한 조사가 뒤따를 수 있다.
송윤아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보험사기가 갈수록 치밀해져 범죄를 입증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보험사기가 만연하다보면 (보험)제도 자체가 매끄럽지 못하게 돌아갈 소지가 크고, 이는 곧 선량한 피해자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②보험금 부풀리기, 범죄 아닌 재테크?
잘못된 국민의식 가장 큰 문제
보험범죄자 중 징역형 10% 불과
솜방망이 처벌도 사기 부추겨
#. 뒷범퍼를 살짝 스친 사고일 뿐인데 상대방 운전자는 뒷목을 감싸 쥐고 차에서 내리면서 연신 아프다는 시늉을 한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사진 몇 장과 함께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는 합의를 보라며 현장을 떠난다. 가해자는 보험처리를 하겠다며 연락처를 건네주고, 피해자는 곧바로 병원에 달려가 드러눕는다. 국내 도로에서 발생하는 차량 접촉사고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보험사기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죄의식이 크지 않은 데다 적발이 되더라도 처벌 수위는 '솜방망이'에 그치기 때문이다. 적발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 또한 보험사기 증가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 '보험금 = 눈먼 돈', 그릇된 인식 = 지난해 보험사기에 연루된 8만3181명 가운데는 평범한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는 물론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공무원과 교육계 종사자도 상당수(1622명) 포함됐다. 또 학생, 군인, 운동선수, 병원관계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연루됐다.
이는 보험사기가 사회 각계각층에 만연해 있고, 국민 대다수가 보험사기에 대한 죄의식이 낮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보험금 = 눈먼 돈'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국민의식이 보험사기를 부추기는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심의기 형사정책연구원 박사는 "보험사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부 당사자들이 이를 범죄로 인식하기보다는 단순한 부풀리기나 융통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보험금은 눈먼 돈으로 여겨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 삶의 지혜로까지 치부된다"고 말했다.
◆ 보험사기 적발은 '한계' = 수사기관과 보험사가 조사를 강화하고 있지만 보험범죄가 갈수록 지능화되고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탓에 이를 적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민간 보험사들은 보험사기 전담조사팀(SIU)을 자체적으로 꾸려 급증하는 보험범죄에 대응하고 있지만 조사권이 없는 탓에 증거를 확보하거나 세부 내용을 조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SIU 경력 15년차의 한 베테랑 조사관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을 뒷바침하는데 한계가 있는 사례들이 부지기수"라며 "조금만 더 파고들면 (사기)입증할 수 있는 사건도 조사권이 없어 중간에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보험사들이 각종 증거자료를 확보해 수사기관에 넘기더라도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횡포를 부린다'는 민원이 제기되면 회사 이미지 실추를 우려해 이를 다시 취하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같은 이유 등으로 현재 전체 보험사기 중 15% 정도만 적발되고 있는 실정이다.
◆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 보험사기가 활개를 치는데는 '솜방망이' 처벌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2010~2011년 보험사기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은 211건을 분석한 결과, 보험범죄자 796명 중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10.6%인 84명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2년 이하의 징역이 대부분(92.8%)이다. 보험금을 노린 살인ㆍ방화 등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보험범죄자 10명 중 9명은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난 셈이다. 사법처리된 보험범죄자의 574명(72.1%)은 벌금형을 받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이 138명(17.3%)이었다.
보험범죄가 '고수익 저위험' 행위로 인식되고 있는 뒷배경에는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이 깔려 있다는 평가다. 느슨한 법망이 보험사기를 부추기고, 보험사기가 횡행하면서 악성 보험범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불황 또한 보험사기 증가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생계형 범죄까지 더해진 탓이다. 지난해 무직ㆍ일용직 근로자들이 보험사기에 연루돼 적발된 사람이 전년도에 비해 19.3% 급증한 1만6089명에 달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③보험사기, 美·獨 수준으로 강력처벌해야
국내는 절반이 벌금형 그쳐
외국 대부분 형사처벌
중국도 액수별 기준 정해
"보험범죄는 전파력이 강해 모방범죄로 이어져 피해가 확대될 뿐 아니라 살인, 방화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같은 보험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한데, 처벌 수위가 낮다보니 이에 대한 법 제도 개선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전직 경찰 출신으로 민간 보험회사에서 십수년동안 보험사기를 분석하고 있는 베테랑 조사관의 말이다. 보험사기는 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처벌 수위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험범죄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국내 보험범죄에 대한 처벌규정은 형법상 사기죄로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강력범죄와 연관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보험사기범이 불구속기소 또는 벌금형에 그치는 등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보험사기에 대한 형사처벌 비율이 24%에 불과하고, 실형을 선고받더라도 1년 이하가 70%를 넘는다.
전문가들은 '보험사기죄' 신설을 통해 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신의기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실장은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는 광범위하기 때문에 국민 전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보험사기 방지를 위해 형법상 '보험사기죄'를 신설하거나 '보험사기 처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보험제도 자체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는 점을 고려해 법원의 양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보험사기를 하나의 사기 유형으로 규정해 처벌하는 나라가 많다. 보험사기죄를 형법에 편입해 형사처벌하고 있는 국가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보험사기죄를 형법이나 특별형법에 포함해 사기죄와 별도로 형사처벌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연방과 주에서도 형법에서 보험사기죄를 적극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 또한 형법에서 비교적 큰 액수, 매우 큰 액수, 특히 매우 큰 액수로 보험사기 금액의 기준까지 설정해 놓고 있다.
보험업계는 보험범죄 예방을 위한 일환으로 민간조사관제도 도입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이는 검찰과 경찰 등 수사시관이 모든 범죄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수사해 혐의를 입증하기란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부와 보험업계는 2009년 7월부터 서울중앙지검 내 정부합동 보험범죄 전담대책반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지만 이 같은 조치가 한시적이라는 점에서 지금은 유명무실한 상태다.
보험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사행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보험회사 스스로 책임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언더라이팅, 보험금 심사, 상품개발 등 모든 부분에서 보험사기 유발요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송윤아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보험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출구단계에서 조사를 통한 적발은 한계가 있으므로 상품개발, 보험가입심사, 보상 등 입구단계에서부터 보험사기 유발요인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보험범죄에 대한 국민 계도와 홍보 강화도 필요하다. 보험범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보험범죄 수사에 거부감이 있는 국민이 다수다. 보험범죄 근절을 한다고 해서 선량한 보험계약자가 보험금을 수령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국민의 불만이 나와서는 안되는 만큼 정부 대책도 보험사가 아닌 국민을 위한 대책이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국회엔 보험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법안들이 제출돼 있는 만큼 이 법안들이 통과되면 보험사기 처벌강화 등 법적근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고형광 기자 kohk010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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