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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7초

'오-매 단풍 들것네'/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오-매 단풍 들것네'//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이 전라도 강진 출신의 시인이라는 것을 모를 때, 내게 저 말 '오-매 단풍 들것네'가 영혼의 혈관 속에 흘러 들어왔다. 우습지만 경상도 억양으로 저 말을 되뇌이며 순정한 경탄을 열 몇 살의 감성 속에 아로새겼다. 수십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음악적인 전라도 말이 귀에 들어온다. 스물 몇 살에 알았던 전라도 장흥의 그 뺨 붉은 소녀와 겹쳐지며, 놀람이 그득한 동그랗고 맑은 눈이 그제야 어룽어룽 내 눈에 닿는다. 따악 지금쯤이다. 열하(熱夏)를 지겹도록 앓고난 다음 아침저녁으로 귀뚜라미 소리처럼 기어드는 소슬바람 몇 가닥이 피부에 까슬한 삼베적삼처럼 닿는 때, 그때 문득 마당에 툭 떨어지는 감나무 잎 하나. 아직 대강은 파랗지만 잎사귀 골짜기가 슬그머니 붉어져 있다. 바람결에, 먼데서 온 편지처럼 무심히 툭 떨어지는 붉은 잎. 소녀는 연애편지라도 받은 것처럼 뺨이 덩달아 붉어진다. 곁에 있던 오빠는 무심히 말을 걸어본다. 왜 놀라니? 추석이 벌써 가까이 다가와서 설레는 거니? 아니면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이제 곧 추워질까봐 걱정하는 거니? 그러나 누이는 오빠 말엔 댓구도 하지 않고 빠안히 나뭇잎만 쳐다보고 있다. 오-매 단풍 들것네. 그 은근하고 새침한 동어 반복. 말맛이 익어 함께 또옥 떨어질 것 같은, 어느 멋진 초가을 하늘 아래.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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