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지갑 얇게 해선 안돼" 대통령 발언 이후 정책급선회
[아시아경제 정종오·김인원 기자]12일 하루 동안 청와대, 기획재정부, 새누리당 등 당·정·청은 벌집을 쑤신 듯 긴박하게 돌아갔다. 발단은 세법개정안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의 깜짝 발언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서민과 중산층의 지갑이 얇아지는 것은 새 정부의 정책방향이 아니다"며 "세법 개정안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했던 수석들은 물론 기획재정부, 새누리당까지 비상이 걸렸다. 조원동 수석은 상황의 심각성을 현 부총리에 알렸다. 한 시간 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석준 2차관, 김낙회 세제실장 등은 국회에서 당정협의회를 갖는다.
새누리당에서는 황우여 대표, 김기현 정책위의장, 유기준, 심재철, 한기호 최고위원 등이 참석했다. 일정이 공지되지 않았던 긴급 당정협의였다. 황 대표는 곧바로 비공개로 전환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 부총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세법개정안의 방향은 맞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호 대변인은 "현 부총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정무적 판단이 부족해 이렇게 됐다'면서 몇 번 사과했다"고 말했다. 오전 당정 협의는 점심시간을 넘겨 12시 20분 쯤 끝났다. 여당은 첫 번째 당정 협의에서 증세기준을 345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릴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당정협의를 끝낸 현 부총리는 세제실 관계자들과 당정협의에서 나온 내용 등을 검토하면서 수정안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이어 오후 4시, 두 번째 당정협의가 진행됐다. 원내대표실에 김기현 정책위의장, 윤상현 수석부대표, 나성린·안종범 정책위부의장, 유일호 대변인이 속속 도착했고 4시10분 쯤 현 부총리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두 시간 계속된 뒤 오후 5시 50분 쯤 끝이 났다. 이 자리에서 기재부는 13일 오후까지 수정안을 마련해 새누리당 의원 총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오전 당정협의에서 한층 진전된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서 중산층의 세 부담을 줄이고 고소득자의 탈루방지대책을 통해 부족한 세수를 메우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현 부총리는 회의실을 빠져나가면서 "여기서 말씀 듣고 했으니까 앞으로 기본적으로 중산층과 서민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에서 다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두 차례 당정협의가 끝난 오후 6시32분. 예정에 없던 긴급 브리핑이 결정됐다. 기획재정부 출입기자들은 "세법개정안 관련 부총리 브리핑. 오후 7시. 서울청사"라는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현 부총리는 오후 7시 서울청사에서 "정부는 각계에서 제기된 의견을 토대로 원점에서 세법개정안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통령의 첫 발언이 나온 지 9시간 만이었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떠난 현 부총리는 이어 오후 8시쯤에 이석준 차관, 김낙회 세제실장 등과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이어 기재부 세제실은 수정안 마련을 위한 밤샘작업에 들어갔다. 이 차관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르면 13일 오후, 수정안을 갖고 새누리당과 협의한다.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13일 "오늘중에 수정안을 발표할 지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며 "곧 발표하지 않겠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진 당·정·청의 24시간이었다.
세종=정종오·김인원 기자 iko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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