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광호 기자]정부는 지난달 30일 우윳값 인상을 막기 위해 유통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했다. 과거 제조업체를 비틀어 가격인상을 못하게 막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정부의 물가정책이 '을'인 제조업 비틀기에서 '갑'인 유통업체 달래기로 진화하는 모습이다. 갑을 통해 을을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과정에서 시장논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지난 6월말 낙농진흥회 이사회는 '8월 1일부터 원유가 12.7%(106원) 인상'을 결정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원유가 인상은 우윳값 인상 도미노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반기 물가 불안 우려가 제기됐으나 농식품부는 "문제없다. 모니터링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유업체들도 '원유가가 100원 오르면 우윳값은 300원 오른다'는 관례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수차례에 걸친 실무회의를 통해 흰 우유를 리터당 최대 350원 인상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여기까지는 시장논리가 제대로 작동했다.
하지만 원유가 시행일 이틀 전인 지난달 30일 상황이 급변했다.
농식품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서 유업체들의 갑인 대형마트(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하나로클럽)를 불러 가격인상을 막고 나선 것이다. 기재부는 원유가 인상에 따른 시장 동향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묵언의 압박이었다.
기재부로서는 입점업체와의 갑을 논란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안고 있는 갑을 조정함으로써 적자를 호소하고 있는 을을 쉽게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갑 역시 정부의 물가안정대책에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 손해나지 않은 결정이다.
이는 통상 우윳값과 관련해서는 농식품부와 유업체가 결정해 온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2년 전 우유값 논란이 있을때에도 서규용 전 농식품부 장관이 유업체 대표들을 불러 논의했다.
당시에도 대형마트의 반대로 가격인상이 무산되긴 했지만 이번처럼 기재부가 유통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가격인하 자제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재부가 이러한 관행을 깨고 대형마트와 우윳값 인상자제를 주도한 것이다. 추석을 한달여 앞두고 식탁 물가 불안을 우려한 것으로 관측된다.
유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제조업체의 가격을 직접 통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갑을 관계를 교묘히 활용, 유통업체를 통해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며 "갑을간 갈등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유업체들은는 "인상을 철회한 것이 아닌 보류한 것"이라는 입장이어서 가격 인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서울우유는 앞으로 일주일은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버티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우유 관계자는 "하루 평균 2000톤의 원유를 사용한다"며 "원유가가 106원 올라 가격을 인상하지 못할 경우 하루 2억원의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양유업과 매일유업도 하루 1000톤에 달하는 원유를 사용, 하루 1억원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매일유업 관계자는 "우리가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고 대형마트가 인상분을 받아들이지 않아 인상을 당분간 보류한 것"이라며 "우유 재료인 원유가가 오른 만큼 가격을 올리겠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못박았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