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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그레셤의 법칙'과 국제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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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그레셤의 법칙'과 국제중학교 이의철 정치경제부장 겸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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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惡貨ㆍ나쁜 통화)가 양화(良貨ㆍ좋은 통화)를 쫓아낸다"는 이른바 '그레셤의 법칙'은 근대 화폐경제의 출범을 알리는 명제다. 16세기 영국의 재정고문이었던 그레셤의 위대함은 그러나 그의 통찰력이 단지 화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조직 내 인사의 방향이라든지, 정부의 정책에서도 그레셤의 통찰력은 유효하다. 그래서 정부가 특정 정책을 만들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 않도록"만 설계하더라도 그 정책은 90%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금융계에선 관치금융이 어떻고 모피아(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가 어떻고 하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지만, '교육행정' 분야에선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다.

교육 공무원들의 관치행정,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특정대학교 출신의 끼리끼리 문화는 대한민국 교육을 30여년 넘게 멍들게 했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국제중 비리를 해결한답시고 내놓은 '국제중학교 학생 추첨제'는 무능한 교육행정의 결정판이다.


영훈ㆍ대원 국제중학교의 추첨 선발제도는 성적을 조작하고 뇌물을 받아 학생을 부정입학시킨 두 국제중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서울시 교육청이 내놓은 방안이다.

국제중의 기존 일반전형은 자기계발계획서ㆍ교사추천서ㆍ학교생활기록부 등을 평가해 정원의 3배수를 선발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한다. 추첨제는 이 같은 서류심사를 일절 없애고 오로지 추첨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한다.


추첨제를 시행하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갈까. 우선 첫해는 영훈ㆍ대원 국제중의 경쟁률이 올라갈 것이다. 추첨으로 한다는데, 너도나도 지원을 안 할 이유가 없다. 되면 좋고, 떨어져도 그만이니 수요자 입장에선 밑질 게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발된 학생들은 어떤 교육을 받게 될까. 국제중은 '잠재력 있는 학생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다. 국어와 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지며, 그런 점에서 수월성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 자질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하지만, 양질의 교육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학생도 필요하다.


지금처럼 3배수로 뽑아도 학생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고(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같은 학생들의 수준을 수업이 가능하게끔 조정하는 데 6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게 현직 국제중 교사들의 전언이다.


단언컨대 추첨으로 선발된 학생들에겐 수월성 교육이 제공되기 힘들다. 그렇다면 학부모와 학생 입장에선 일반 중학교의 4배 가까운 돈(분기당 100만원이 넘는 수업료)을 내고 국제중에 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


국제중의 이런 상황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 나는 데는 6개월이면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추첨제를 도입한 그 다음 해는 국제중의 경쟁률은 확 떨어질 것이다. 지원자가 없어서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국제중 폐지를 이런 식으로 하려는 것이라면 모를까, 얼토당토않은 정책이다.


서울시 교육청은 "국제중 설립 취지는 학생을 뽑아 글로벌 인재를 만드는 것이지 원래 우수한 인재를 뽑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궤변이다. 그렇다면 서울대는 왜 추첨으로 뽑지 않는가. 차제에 전국의 모든 대학에 추첨제를 도입해 신입생들을 선발하는 것은 어떤가. 그러면 해마다 수학능력시험을 볼 필요도 없고, 대학별로 복잡한 입시 전형을 만들 필요도 없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교육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경제 정책을 포함한 모든 정책을 만들 때 정책 입안자들이 고민해야 할 사안은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국제중 학생을 추첨으로 뽑자"는 수준의 정책을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교육관료들의 그 뻔뻔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구축해 버려야 하는 '악화'는 이런 정책, 이런 공무원이다. 참고로 필자의 자녀들은 대원이나 영훈중학교에 지원해 본 적도 없고 다닌 적도 없다.






이의철 정치경제부장 겸 금융부장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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