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정상적인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종전까진 이혼에 합의하는 등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만 강간죄가 인정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16일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특수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45)씨에 대해 징역 3년6월을 선고하고, 7년간 정보공개·고지 및 10년간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을 명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형법이 강간죄의 객체로 규정한 ‘부녀’란 성년·미성년, 기혼·미혼을 불문한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처’를 제외할 아무런 제한이 없고, 1995년 개정된 형법이 강간죄로 보호하려는 법익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가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사회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 법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민법상 인정되는 부부 사이의 동거의무와 성생활을 함께 할 의무에 폭행, 협박에 의한 강요된 성관계를 감내할 의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없고, 이는 혼인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고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참아내는 과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상훈, 김용덕 두 대법관은 “부부 사이의 성관계라고 하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면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찬성한다”면서도 “사전적 의미나 제정 목적 등을 감안하면 강간죄는 배우자가 아닌 부녀에 대한 성관계 강요를 처벌하는 조항으로 강간죄가 아니라도 폭행, 협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A씨는 2011년 부인 B(41)를 부엌칼로 찌를 듯 위협한 뒤 칼을 옆에 둔 채 겁먹은 B씨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거나, 부엌칼로 B씨 옷을 찢고 배에 들이대며 반항을 억압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2심 모두 A씨를 유죄로 판단했지만 부인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선처를 요구하는 등 형량만 당초 징역6년에서 징역3년6월로 낮아졌다. 재범의 위험성이 없다며 전자발찌 부착명령을 취소해달라는 A씨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법률상 ‘처’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와 양성평등 사회를 지향하며, 혼인과 성에 관한 시대변화의 조류와 보조를 같이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준영 기자 fox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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