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 관한 험담은 기묘한 쾌감을 주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험담이 가해지는 그 상대가 디스카운트되는 그만큼 자아에 대한 상승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나쁨을 규탄하면 할수록 자신은 나쁨에서 구원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자면 흉보기는 나르시시즘의 일종이다. 어떤 대상에게서 나오는 열기로 자신의 체온을 데우는 행위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기실 속으로 무척 외로운 자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자부심으로 '온기'의 자가발전이 되지 않으므로, 타인의 반사열을 이용하는 기생(寄生)의 삶이다.
상대가 앞에 있을 때 험담을 꺼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야 튀어나온다. 왜 그럴까. 험담꾼들은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욕설과 비난을 풀어내는 가학심리는 그 발언의 환경이 안전하다는 걸 판단한 뒤에 작동을 시작한다. 사실 이런 험담이 그 상대의 귀에 흘러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만 만발하다가 완전히 소멸된다면, 권장되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억눌린 생각과 고여 있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등 뒤의 말들이, 자주 걸어나와 그 험담의 주인공의 귓속까지 흘러온다는 점이다. 험담은 대개 팩트와 견해가 뒤섞인 말이다. 험담에 팩트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진실이라고 말하는 건 성급하다. 팩트를 가공하는 1%의 견해만으로도, 팩트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견해를 피력하는 방법에 악의가 작동하면, 팩트는 맥락을 벗어나 미친 듯 날뛸 수 있다.
그 어떤 험담꾼도 자기 자신을 험담하는 일은 없다. 왜 자기를 험담하지 않는 것일까. 자기에 관한 팩트를 다룰 때, 인간은 결코 '악의적인 견해'를 포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팩트만 엄격하게 다루거나 팩트보다 나쁘지 않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타인에 관한 험담을 '자기 스스로에 대한 험담'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험담의 유통은 불가능하다. 타인에 관한 험담들은, 어디서든 누군가가 자기를 험담할 수 있는 '불안'을 키우는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왜 이런 글을 쓰느냐고? 편집국의 붙박이인 기자가 간만에 외국에 나가려고 생각하니, 괜히 부재중인 나의 뒷담화가 켕겨서 단속하는 중이다.
<향상(香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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