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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경제민주화와 '돈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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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칼럼]경제민주화와 '돈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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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4류, 관료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다." 1995년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이건희 삼성 회장의 '베이징 발언'이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의 남발에 대한 비판이었다. 통쾌해했던 국민과 달리 돌직구를 맞은 정치권과 관료 조직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급기야 삼성은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8년이 흐른 지금, 다시 정치권을 향한 기업들의 볼멘소리가 높다.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이 줄줄이 국회에 오르며 소리는 더 커졌다. 4월 국회에서만 징벌적 손해배상을 담은 하도급법, 등기임원의 연봉을 공개토록 한 자본시장법, 매출의 5%까지 과징금을 물릴 수 있는 유해물질관리법 등의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가맹주의 권익을 강화한 프랜차이즈법, 국세청 정보 취합을 확대한 금융정보분석원법, 그룹 총수의 사면권을 제한한 사면법 등의 개정안이 소관 상임위를 통과했거나 대기 중이다. 6월 국회를 기다리는 경제민주화 법안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경제민주화란 이름표는 달지 않았지만 재계가 손사래 치는 60세 정년연장법도 통과됐다. 대체휴일법은 계류 중이다. 재계의 불만은 '경제도 어려운데, 기업까지…'로 모아진다.

경제민주화 관련법의 봇물은 2류(기업)의 발목을 잡는 3류ㆍ4류(정부ㆍ정치)의 무차별 공세인가. 국민이 심판대에 오른다면 어떤 판정을 내릴까. 정치권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고, 기업은 국력 신장의 동력이라는 데 국민의 대다수는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만을 떼놓고 보면 여론은 결코 기업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 속에는 기업이 읽지 못한 시대의 변화와 고단한 서민의 삶, 그리고 무언의 사회적 합의가 두루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주장은 대개 '돈(비용)의 논리'에서 출발한다. 대체휴일제에 대해서는 '인건비 4조원, 근무일 축소에 따른 생산 감소액 28조원 등 손실 총 32조원'을 앞세운다. 근로자의 재충전이나 소비의 확대 등은 모른 체한다. 유해물질 사고 사업장에 매출의 최고 5%까지 과징금을 물리겠다고 하자 '매출 1조원에 과징금이 500억원'이란 단순 셈법을 들이댄다. 어느 누가 기업을 결딴내려 결심하고 모든 사고에 최고 과징금을 물린단 말인가.


60세 정년연장도 그렇다. 50대의 월급이 젊은 사원의 2~3배에 이르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진다면서 부담의 증가를 강조한다. 아버지와 자식의 일자리 다툼으로 내몬다. 20~30년 회사에 헌신한 50대 직장인, 그들의 노하우나 경험을 자산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짐으로 여기는 태도다.


정년연장은 난데없는 발상이 아니다. 전체 기업의 35%가 이미 60세 이상 정년제를 도입했다. 그럼에도 직장인의 실제 퇴직 연령은 평균 53세다. 지난해 직장을 떠난 베이비붐 세대 57만명 중 정년퇴직자는 8000명에 불과하다. 청년실업을 걸고 넘어질 만한 숫자가 아니다. 정년연장에는 급속한 고령화, 막막한 노후, 5060세대의 정치적 파워 등이 얽혀 있다. 단순한 비용의 논리만으로 맞설 수 없는 복잡한 문제다.


경제민주화는 정치권의 창작물이 아니다. 민심의 바닥에서 떠오른 여론이다. 정보화 시대, 인터넷 물결이 불러온 경제의 정치화 현상이다. 50대 투표율에 놀란 정치권이 60세 정년을 밀어붙였다. 우연일까. 라면 상무, 빵 회장, 대리점 욕설, 잇단 유해가스 사고는 또 다른 원군이 되었다.


기업도 따질 것은 따지고 할 말은 해야 한다. 하지만 시대정신과 사회적 책임에서 비켜서면 안 된다. 가슴을 열고 세상을 보라. 돈의 논리를 넘어서 여론을 우군으로 만드는 세련된 전략을 세워라. 낡은 논리의 포로가 되어 계속 시대의 요구를 눈감는다면 기업 역시 4류일 뿐이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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