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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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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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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반짝거리는 물비늘이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것처럼 하림더러 어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하림의 마음은 다시 이른 봄빛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겨우내 얼어붙어있던 흔적처럼 응달 쪽 가장자리엔 아직 얼음이 얼어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녹아서 푸른 잔물결 위에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밑둥지가 물에 잠긴 버드나무 사이로 물오리들이 떼를 지어 헤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화실에서도 들리던 꽥꽥거리던 소리는 그놈들이 지르던 소리였다. 미끄러지듯 물 위에 긴 자취를 남기며 헤엄치던 물오리 몇 놈이 하림의 기척 소리를 듣고 제풀에 놀라 푸드덕 날개 짓을 치며 날아올랐다.


꽈악....! 꽈악....!
물오리가 지르는 긴 울음소리가 푸른 하늘에 돌팔매질이라도 하듯, 정적을 깨뜨렸다. 날개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며 작은 물보라를 만들었다. 놀라서 날아오르는 오리를 보자 하림은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을 뿐 하림은 마치 처음 온 정복자처럼 작대기를 질질 끌며 저수지 가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하림은 들고 있던 작대기로 마른 풀과 나무를 툭툭 쳤다. 이제 곧 이 풀과 나무에도 물이 오르고 새싹이 돋아 나오리라. 생각하면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 생명이 있으니 죽음이란 것도 있고, 생명이 없으면 또한 죽음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게 없다면 부활이라는 말도, 영생이라는 말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어떻게 보자면 생명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얼마쯤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물오리 울음소리 사이로 우루루 쾅쾅, 하는 이런 골짜기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는 평화로운 마을에 갑자기 몰려온 적군의 탱크소리처럼 난폭했고, 거침이 없었다.


무슨 소린가....?
하림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저수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같았다. 누군가 돌을 깨거나 산을 뭉개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직감적으로 그게 아까 사내 둘이 이야기했던 송사장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꾸미고 있다는 콘돈가 뭔가 하는 위락 단지 조성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르렁....! 크르릉.....!
산이 무너지는 소리에 이어 가래 끓는 소리처럼 포크레인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 소리는 하림의 가슴에 뭔가 모르게 일말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하림의 머리 속에 다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콘도와 기도원.....


하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냄새를 풍기는 단어였고, 다른 하나는 지극히 비세속적인 냄새를 풍기는 단어였다. 그리고 지금 그 지극히 세속적인 단어와 지극히 비세속적인 단어가 지금 이 아름다운 저수지와 계곡에서 어울리지 않게 조우를 하려 하고 있었다.


문득 그 단어 뒤에 숨어있을 전도사라는 이층집 영감 딸과 송사장이란 사내도 떠올랐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채 이 골짜기로 흘러와 이마를 맞대고 있을 터였다. 그러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 저 밑바닥에서 이상하게 침샘처럼 괴어오르는 호기심 같은 것을 느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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