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난 하림은 소화 겸 하여 세차 대신 산책을 나섰다.
누구 말마따나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는 것 아니듯 오래된 똥차 세차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고, 도처에 비포장도로라 금세 더러워지고 말 것, 이따가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얼마나 지낼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화실이 있는 근처 지형을 익혀두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선 하림은 먼저 마당에 버려져 있던 작은 작대기 하나를 주워들고, 햇빛 가리개용 챙이 넓은 운동모까지 썼다. 하림의 발걸음은 포도나무 밭과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아침에 갔던 길목 수퍼 가는 길과는 정반대로 저수지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이랑 될 수 있는 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하림의 머릿속엔 아까 두 사내가 나누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하림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은 영감 이야기가 나오자 이장인 운학이 느닷없이 화를 내었던 부분이었다. 그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릴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펌프 고치러 온 염소 수염 사내는 그저 자기가 들었던 대로 영감이 범인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하림이 생각해도 가장 높아 보였다. 그런데 운학은 그렇게 단정하지 말라며 화까지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감의 딸이 전도사라는 말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다 미인이라니....윤여사 이야기와는 정반대였다. 그날 동묘 앞에서 한 윤여사 이야기로는 이층집 영감은 사납게 생겼고, 영감의 딸 역시 아버지를 닮아 사납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고 했다. 하긴 사납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고 하여 못 생겼으리란 법은 없었다. 어쨌거나 윤여사의 말 뉘앙스로 볼 땐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였는데, 두 사내의 이야기 속에 비친 이미지에서는 무언지 모르게 다른 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대저 같은 여자라도 여자가 보는 여자랑 남자가 보는 여자는 다른 법이다. 여자가 보는 여자는 그저 그냥 여자일 뿐이지만 남자가 보는 여자는 미학적이요, 우생학적이며, 생리적이고, 심리적이고, 동시에 시적이고 소설적인, 복잡한 요소가 들어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펌프 고치러 온 염소 수염 사내가 ‘상당히 미인이라든데....’ 하고 무심코 던지는 말 속에도 여러 가지 자기도 모르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랑 송사장이랑 공사 때문에 대판 싸움을 벌였다니....
하림은 걸어가면서 작대기로 마른 억새풀 대궁을 툭툭 치며 생각했다.
기도원과 콘도....
그곳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경계가 느껴졌다.
그리고 운학이 이야기 중 또 하나 갈고리처럼 걸리는 부분은 윤여사 고모네 집 누렁이들의 죽음이후에도 개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연쇄 살인(殺人) 사건은 아니지만, 굳지 이름을 붙이자면 분명 ‘연쇄 살견(殺犬) 사건’ 정도라 할 수 있을 터이고, 그렇게 일단 연쇄라는 말이 붙으니까 무언지 모르게 추리소설 같은 긴박감이 배어나왔다. 그렇다고 쫄 거야 없었다. 어떤 인간이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기껏해야 미치광이거나 개 혐오증을 지닌 정신병자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런 인간에게 위축되거나 굴할 장하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림은 가슴을 쭉 펴고, 가볍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걸어갔다. 마른 잡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얼마 가지 않아 앙상한 겨울 버드나무 사이로 반짝, 하며 저수지가 나타났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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