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언제나 섹시한 주제다. 기술도 그렇다. 따라서 1990년대 중반 디지털 캐시의 등장을 맞이한 호들갑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사적인 전자화폐가 재빠르게 달러나 독일 마르크와 경쟁하리라고 예측했다. 중앙은행들은 자신들이 구닥다리가 될까 걱정했다. (The Economist, E-Cash 2.0, 2000.2.19)
가상화폐 비트코인이 화제가 되면서 민간에 의한 화폐발행 가능성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이 이슈는 다음 물음으로 나눌 수 있다. 비트코인이 화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비트코인과 비슷한 다른 가상화폐가 속속 등장해 통용되면서 가상화폐의 규모가 확대될까? 신용카드와 계좌이체 같은 기존 결제시스템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가상화폐는 법정통화가 갖춰야 할 조건을 충족하는가? 결국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위협을 받을 것인가?
비트코인의 본질을 둘러싼 질문들
화폐금융을 전공한 학자나 관련된 기관과 업계가 풀어야 할 이런 문제를 제쳐두면, 일반인에게 관심사는 다음 두 가지 물음이다.
'거래 상대방이 대금을 비트코인으로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신은 비트코인을 받을 것인가?'
'당신은 비트코인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가? 즉 비트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리라고 보는가?'
답을 찾기 앞서 비트코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비트코인은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의 인물 또는 집단이 '최초의 탈중앙집권적 디지털 화폐'를 표방하며 2009년에 만들었다. 기존 화폐가 중앙은행에 의해 발행되는 것과 달리 비트코인에는 중심 통화당국이 없다.
비트코인은 고도의 수학적 암호를 풀면 50 비트코인이 이체되는 이른바 채굴(mine) 과정을 통해 발행된다. 암호가 풀리고 비트코인이 일련의 숫자로 발행될 때마다 암호의 난이도가 더 올라가 통화량 증가 속도가 느려진다. 비트코인 총량은 2100만 단위까지 발행되도록 설계됐다. 현재 약 1100만 단위가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주소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공개키 암호 방식으로 수수료 없이 이체된다. 간단히 말해 e메일처럼 주고받을 수 있다. 비트코인 주소는 bitcoin. org 에서 비트코인 지갑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면 생성된다.
발행물량이 제한된 데 주목해, 투자 측면에서 비트코인을 사들이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마운틴 곡스(Mt.Gox), 트레이드힐(Tradehill) 같은 중개 사이트가 생겨났다.
비트코인 가치는 키프로스 금융위기 이후 급등했다. 비트코인의 달러 환율은 1월만 해도 15달러였다가 치솟아 4월 10일에는 266달러를 기록했다. 2주 사이 3배로 뛰기도 했다가 하루동안 반토막이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했다. 20일에는 마운틴 곡스에서 119달러선에서 거래됐다. 이 환율로 계산하면 비트코인은 현재 약 13억2000만 달러 규모가 발행돼 유통된다.
이와 같은 비트코인이 화폐의 반열에 오르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교환매개, 지급, 가치저장 등이다. 교환매개란 상품을 팔아 다른 물품을 구입하는 거래의 매개 역할을 말한다. 지급은 예컨대 월급을 주고 돈을 빌려주거나 받는 것처럼 금전적인 관계를 맺거나 청산하는 기능을 뜻한다. 가치저장 수단이 되려면 값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화폐 값이 빠르게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그 화폐는 가치저장 수단이 되지 못할 뿐더러 경제활동을 왜곡시킨다.
교환을 매개하고 지급수단이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 지갑을 내려 받아야 한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비트코인으로 계산한다고 하자. 그 편의점이 비트코인 지갑을 갖추지 않았다면 계산이 이뤄지지 못한다. 비트코인이 화폐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정도의 기반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비트코인을 받는 곳은 소셜 미디어 사이트 레딧(Reddit), 웹호스팅 업체 워드프레스(WordPress) 등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비트코인이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러 전자화폐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고 본다. 디지캐시, 사이버캐시 등 당시 전자화폐는 소프트웨어로 계좌의 돈을 주고받는 결제를 중개했다. 비트코인이 돈과 독립된 가상의 존재라는 데 비추어 훨씬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그러나 통용되지 못했다. 이용자가 별도의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 했고, 그런 이용자가 적었고, 그래서 쓸 수 있는 곳이 적었다.
이후 2000년을 전후로 2세대 전자화폐 바람이 불었다. 신용카드보다 저렴한 수수료로 소액결제를 중개한다는 업체들이 도전장을 냈다. ‘온라인 계정에 돈을 이체해 두고 소액을 차감한다’, ‘결제액이 쌓이면 신용카드로 계산하도록 한다’, ‘달러를 e메일로 이체한다’ 등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그러나 2세대 업체도 살아남지 못했다. 인터넷 소액결제는 이미 갖춰져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수단을 통해 이뤄졌다. 휴대전화 요금에 더해지는 방식이 채택됐다. 현금을 계좌이체나 신용카드 결제로 쇼핑 사이트에 쌓아놓고 아이템을 구매할 때마다 금액을 빼내는 방식도 널리 활용됐다. 시스템은 공고하다. 1세대와 2세대 전자화폐가 뚫지 못한 기존 결제 시스템의 아성을 비트코인이 넘어서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비트코인은 돈을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어서 이전 전자화폐와는 '신분'이 다르지 않은가.
이건 기술적인 부분이다. 비트코인이 기존 화폐처럼 일반적 수용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지난 3월엔 어떤 캐나다인이 자신의 집을 내놓으면서 매각대금을 비트코인으로도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얘기가 BBC 전파를 탔다. 당신이라면 집값을 비트코인으로 받겠는가? 회사에서 월급을 비트코인으로 지급한다고 하면 받을 것인가? 흔쾌히 동의할 사람은 소수에 그치리라.
수용성의 측면에서 비트코인을 게임머니를 비롯한 다른 범주의 사이버 머니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게임머니는 이제 법으로 금지됐지만, 현금으로 거래됐다. 제한적인 영역이지만 무엇에 쓸지가 분명하고 효용을 지닌 특성 덕분이었다. 반면 비트코인은 제시할 효용이랄 게 딱히 없다. 굳이 들자면 희소성인데, 그 희소성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현금을 포기할 성 싶지는 않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칼럼(The Antisocial Network)에서 '화폐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수단'이라는 말을 전하며 "돈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정도로 유용하다"고 말한다. 쓸 곳이 거의 없고 쓸려면 달러로 바꿔야 하며 지급수단 구실도 하지 못하는 비트코인을 이용하는 사람은 좀처럼 늘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 디지털시대의 어설픈 연금술
비트코인은 가치 저장수단으로도 적합하지 않다. 기존 화폐는 값이 떨어지는 위험이 있는 반면 비트코인은 가치가 안정적이지 않다. 일부 사람들에게 투기 수단은 되겠지만, 경제 전체에 통용되는 화폐는 될 수 없다.
또 예금 등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면 이자소득이 발생하는 반면 비트코인에는 이자가 한 푼도 붙지 않는다. 은행에서 비트코인 예금을 받고 그 자산을 운용하려면 비트코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가격이 급등락하는 데다, 과연 본질적으로 가치를 지닌 것인지 논란이 잦아들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가치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특징은 또 비트코인이 매개수단으로 기능하는 데에도 결격 요인이 된다. 상품의 비트코인 기준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면 거래가 원활히 체결될 수 있을까? 지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질까? 비트코인 시세가 급락한 상황이라면, 파는 사람은 값이 오를 테니 현 시세보다 값을 더 쳐 달라고 할 테고, 사는 사람은 현재 시세로 거래하자고 해 실랑이가 벌어질 것이다.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화폐로서 비트코인의 미래는 밝지 않다. 화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련의 숫자는 그 이후 그 자체로 값어치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코인을 모방한 다른 가상화폐 역시 비트코인과 같은 궤도를 맴돌 것으로 보인다. 가상화폐가 속속 등장해도 중앙은행의 발권력에는 구멍이 나지 않을 것이다.
화폐에는 주술적인 기운이 감돈다. 정교한 기술이 집약되긴 했으되 결국 종이조각일 뿐인 물질이 높은 가치를 지닌 데서 비롯되는 마력이다. 비트코인 주조자는 디지털 시대의 연금술사다. 이들은 과거 연금술사들이 다른 물질에서 금을 빚어내려고 한 것과 비슷하게 숫자에 숨을 불어넣어 화폐를 창조하는 꿈을 꾸고 있다.
백우진 정치경제부장 cobalt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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