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설립...수억원대의 최고급 복잡한 기계식 시계 메이커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 "차고 싶어도 아무나 찰 수 없는 시계, 보고 싶어도 아무나 볼 수 없는 시계"
스위스 시계 명가 파텍필립이 만드는 시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소량 생산해 희귀한데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고, 회사가 구매 고객을 엄선하기에 나온 말이다
.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해 제작한 회중시계 '스타 칼리버 2000'은 다섯 세트(4개가 1세트)만 만들었는데 당시 가격은 600만 달러(한화 약 66억8400만 원)로 추정됐다. 일몰과 일출,웨스트민스터 사원 종소리를 내는 미니트 리피터,요일과 날짜,윤년을 자동으로 맞추는 퍼페추얼 캘린더 등 21가지 기능(컴플리케이션)을 갖춘 시계였다. 2001년 선보인 '스카이문투르비용'은 양면 다이얼 손목시계인데 가격이 무려 175만 달러(약 19억5000만원)나 나간다. 파텍필립의 시계는 가격이 수 천 만원에서 수 억 원대에 이른다.'시계의 롤스로이스'다.
파텍필립의 시계는 희소하다.매우 복잡하면서도 높은 품질을 갖추기 위해 일부 브랜드는 단 10개만 생산하고 다른 브랜드들도 많아야 수 백 개만 생산한다.연간 총생산량도 5만5000개 정도다.
스카이문트루비용
또 구매자도 회사가 엄선한다. 원매자가 인적 사항과 과거 구매내력 등을 적은 서류를 제출하면 제네바 본사가 심사해 판매여부를 결정한다.시계의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공유해야 고객이 될 수 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없다.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이탈리아의 빅토르 에마뉴엘 3,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미국의 재벌 록펠러,과학자 아인슈타인,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 등 유럽의 귀족과 명문가,유명인이 고객이었다.
파텍필립은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와 함께 세계 3대 시계업체로 통한다.시계 설계에서부터 무브먼트(시계를 움직이는 부품집합체)의 제조,완제품 조립,연구개발 등 전 과정을 한 회사가 하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시계메이커이다.
앙트완 노르베르 파텍
이 회사는 1851년 폴란드에서 스위스로 귀화한 장교출신 사업가 앙투안 노르베르 드 파텍과 프랑스의 발명가 장 아드리앙 필립이 설립한 회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올해로 162년이 된 회사다. 파텍이 폴란드 시계장인 프랑수아 차펙과 함께 1839년 설립한 '파텍 차펙 회사'때부터 계산한다면 174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회사는 1932년 인수한 슈테른(Stern) 가문이 81년째 회사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경영하고 있다. 인수자의 손자 필립은 명예회장,증손자 티에리(42)가 회장을 맡고 있다. 가문이 소유한 시계회사가 4대째 경영을 하는 것은 시계산업의 중심국인 스위스에서 조차 드물다. 오데마 피게 이사회 의장인 자스민 피게가 오데마피게의 공동창업자 줄 루이 오데마의 증손녀로 4대째 가업을 잇고 있지만 그는 기자로 일했고 회사에서 일하지도 않아 파텍필립과 견줄 수 없다.
설립자인 파텍과 현 소유주 슈테른 가문은 '품질'과 '예술적 가치'를 중시한다. 파텍은 프랑스에서 무브먼트를 사서 스위스에서 조립을 시키면서 이 두가지를 항상 주문했다. 그러면서 퍼페추얼캘린더,미니트리피트 등 신기술을 개척했다.슈테른 가문도 회사운영 원칙인 '10대 가치'에 전통과 혁신,품질과 정밀한 세공,아름다움을 포함시키고 있다.
파텍필립은 품질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 시계 기술자, 밴드 기술자, 에나멜 세공사, 보석세공사 등 1300여명의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를 자체 보유하고 있다. 파텍필립은 또 1200~1500단계의 생산과정마다 철저한 품질관리를 한다.이 덕분에 파텍필립의 전 생산라인은 명품시계로 인정받는 마크인 '제네바 실'(Geneva Seal)의 보증을 받았다. 2009년부터는 제네바 실 대신 자체 인증시스템인 '파텍필립 실(seal)'을 도입했다. 최소 30일간 무브먼트와 밴드,버클 등을 꼼꼼히 점검한다.마지막으로 티에리회장의 눈을 거쳐야 한다.
스카이문트루비용 무브먼트 구성도
파텍필립이 세계 일류의 지위를 구축한데는 가족 경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파텍필립에 시계 다이얼을 독점공급하던 '슈테른형제다이얼공장'의 사주 샤를과 장 슈테른 형제가 1932년 인수한 이후 줄곧 슈테른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스위스 시계업체 위블로와 태그호이어가 루이뷔통모에헤니시(LVMH)에 넘어가고 피아제와 바슈론콘스탄틴이 리슈몽그룹의 산하에 들어간 것과 달리 파텍필립은 꿋꿋이 독립 기업으로 남아 있다.
두 형제는 대공황이 유럽을 휩쓸면서 자금난에 봉착한 파텍필립을 인수한뒤 1833년 창업한 예거 르쿨트르에서 공급받던 무브먼트의 독자생산을 추진하고 제네바의 시계회사 타바네스시계(Tavannes Watch)의 존경받는 대표 장 피스터(Jean Pfister)를 경영자로 영입,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샤를은 1935년 회장에 올랐다가 1944년 타계하고 피스터도 1946년 사임했다.이에 따라 미국에 있던 샤를의 아들 앙리가 1958년 회장에 취임해 경영을 이어갔다.앙리도 1977년 필립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유능한 경영자였던 필립은 2009년 아들 티에리에게 회장직을 주고 물러났다.
앙리가 가족경영 철학을 수립한 경영자라면 필립은 파텍필립을 중흥시킨 경영자였다. 앙리는 필립에게 세가지 경영철학 즉 파텍필립은 반드시 가족기업이어야 하고, 소규모 독립기업이어야 하며, 수익을 낼 것을 주문했다.티에리 회장은 시계전문지 '와치타임' 인터뷰에서 "사장으로서 첫째 목표는 회사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면서 "독립성은 최고의 품질기준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필립은 '월드타임''애뉴얼 캘린더' 등의 모델을 도입하고 제네바 곳곳에 분산돼 있던 공장을 교외의 최첨단 시설로 이전했으며,스위스 시계 500 역사를 볼 수 있는 시계박물관을 설립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접목하는 데 주력했다.
슈테른 가문이 시계기술자이면서 시장을 잘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요인이다. 샤를의 부모는 시계 에나멜 공이었고, 앙리는 아버지 회사의 금속각인사(인그레이버)였다.필립도 컴퓨터 사업을 하다 1964년 회사에 합류한뒤 미국으로 가서 시계케이스와 시계줄을 연결하는 것부터 배웠다. 티에리는 제네바 시계학교를 졸업한뒤 독일에서 리테일러와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혔다.그 역시 귀국해서는 시계 케이스와 밴드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티에리 회장은 "밑바닥에서부터 시계를 배우는 것이 우리 가문 성공의 비결이자 가족기업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티에리 회장은 현재 고객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상하이에 대규모 매장과 서비스센터를 세워 중국의 부유층을 공략하고 있다. 또 미국 비벌리힐스의 롤렉스 매장 바로 옆에 자체 매장을 열어 미국 시장공략도 가속화하고 있다. 바젤시계 전시회에 아들을 꼭 데리고 참석하는 등 5대 경영도 준비하고 있다. 슈테른 가문이 200년 파텍필립 역사를 쓸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글로벌명문가⑨]스위스 시계名家 파텍필립의 슈테른 가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303220914047951142A_1.jpg)
![[글로벌명문가⑨]스위스 시계名家 파텍필립의 슈테른 가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303220911527893541A_1.jpg)
![[글로벌명문가⑨]스위스 시계名家 파텍필립의 슈테른 가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303220911037872039A_1.jpg)
![[글로벌명문가⑨]스위스 시계名家 파텍필립의 슈테른 가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303220910227855826A_1.jpg)
![[글로벌명문가⑨]스위스 시계名家 파텍필립의 슈테른 가문](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303220909357819001A_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