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100년 하늘 戰士...자산 프랑스 4위 가문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 프랑스의 항공기와 3D솔류선 기업을 소유한 다소그룹의 역사는 정부의 국유화에 대한 저항과 신기술 개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주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부역하기를 거절했다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고 부인과 아들도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다소그룹은 프랑스 정권이 바뀔때마다 국유화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창업과 혁신,신기술개발에 매진하는 인동초같은 집념과 투지를 불살랐다.
1917년 창업 이래 근 100년 동안 가업을 잇고 사업영역을 확장해온 다소가문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들이 핍박받은 유태인의 후손인데다 나치의 탄압과 죽음,정권의 국유화 조치에도 굴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반골기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다소가문은 창업주의 아들과 손자,증손자들이 분가나 골육상쟁없이 그룹경영에 참여하고 있어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기업,장수가문'의 반열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프랑스 4위의 부자가문=다소가문은 지주회사인 다소그룹(GIMB)을 통해 다방면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룹 지주회사 CEO는 창업주 마르셀 다소의 아들인 세르지 다소(87세)가 맡고 있다.그룹 감독위원회에는 세르지의 장남 올리비에와 로랑과 티에리,사위 베느와 아베르가 전무이사와 이사 등으로 뛰고 있다.올리비에는 또 다소커뮤니케이션스의 사장이며,로랑은 생떼밀리용지역에서 고급 포도주를 생산하는 샤토다소의 경영자이기도 하다.
그룹 계열사로는 다소항공과 일간지 르피가로를 포함하는 피가로 그룹,부동산 회사 임모빌리에 다소,예술품경매회사 아르트퀴리알,PLM솔루션과 3D솔루션회사 다소시스템,항공기와 우주산업회사 SABCA,포도주회사 샤토다소가 있다. 다소항공은 민간 여객기 팰콘제트기와 프랑스가 자랑하는 명품 전투기 라팔을 생산하면서 다소가문의 캐시카우 노릇을 하는 기업이다.
다소 가문은 프랑스 정ㆍ재계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손색이 없다. 세르지 일가의 자산은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 추산으로 2012년에 99억 달러(한화 약 10조4600억원)로 평가됐다. 프랑스 4위,세계 93위다. 정계에도 진출했다.창업주가 두 번 의원을 역임했고 세르지는 시장을 거쳐 상원의원으로 활동중이다.그의 장남 올리비에도 하원의원에 재선됐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태인가문=다소그룹은 마르셀블로가 1917년 설립한 항공기 회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다소그룹은 96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창업주의 본래 이름은 마르셀 블로였다.그는 프랑스 유태인 내과의사 아돌프 블로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국립고등우주항공학교(SUPAERO)와 전기전자공학 대학인 브레게스쿨을 거쳐 항공기술대학인 ESAT를 1913년 졸업했다. 마르셀은 학창시절 라이트 형제가 에펠탑 주변을 저공비행하는 것을 보고 항공기에 매료됐다.
22살때이던 1914년 1차대전 발발하자 랭스의 항공연대에 배속돼 프랑스 육군 항공기용 프로펠러를 발명했다.1917년 동업자와 함께 마르셀블로항공회사를 설립했다. 마르셀은 1차 대전 특수로 1000대의 항공기를 팔아 부를 쌓았다.
1919년 부유한 유태인 가구상의 딸과 결혼하면서 항공기 산업을 떠나 건축업에 10여년간 종사했다.마르셀은 항공기 산업에 미래가 있다고 본 블로는 1930년 다시 항공산업에 복귀했고 독일의 재무장에 따른 프랑스의 군비확충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그는 1935년 무렵 이미 백만장자가 됐다.
1936년 급진 좌파 성향의 인민전선이 집권하고부터 다소가문은 시련을 맞이했다.1937년 1월 회사가 국유화되자 마르셀은 그해 12월 항공기 회사 SAAMB를 설립해 전투기를 생산하는 투지를 발휘했다.이것이 오늘날 다소항공의 전신이다.
화불단행일까?.1940년 프랑스를 침공해 점령한 나치군이 전투기 생산을 요구하자 푸조가문처럼 마르셀은 거부하고 잠적했다.그는 1944년 리용에서 체포돼 부켄발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그는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교수형 위협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1945년 독일패망과 함께 풀려난 마르셀은 1946년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형 다리우스 블로 장군의 암호명 '다소'(탱크)를 따 성을 다소블로로 바꿨다가 1949년 다소로 줄였다.
◆60여년간 국유화 압박 버텨낸 다소그룹=시련은 노도처럼 밀려왔다.
전쟁으로 공장이 폐허가 된 탓에 또 국유화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까지 국유화에 시달렸다.197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듬해 공약대로 다소-브레게 국유화에 나서 정부지분을 21%로,의결권은 33%를 확보했다. 이어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랑수아 미테랑은 정부지분을 46%로,의결권을 63%로 각각 늘렸다.
우파 정부라고 다를 게 없었다.1995년 대통령에 당선된 자크 시라크 우파 정부는 국영 아에로스파시알과 다소간 합병동의서를 받아냈다. 1997년 승리한 리오넬 조스팽의 좌파정부 역시 합병압박의 고삐를 죄었다.
그렇지만 마르셀의 의지력을 꺾지 못했다.그는 2차 대전후 '아비용 마르셀 다소'를 설립해 잇따라 전투기를 내놓았다. 다소항공은 1951년 프랑스최초의 음속돌파 전투기 미스테르, 1956년 삼각날개의 미라지3, 1959년 미라지4,1963년 제트여객기 팰콘,1978년 미라지2000 전투기, 1991년 라팔을 개발해 다소의 명성을 높였다.미라지는 1967년 '6일 전쟁'당시 이집트 공군을 단 세시간만에 괴멸시킬 만큼 탁월해 프랑스 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르셀은 1970년 펴낸 자서전 '부적'에서 "위대한 발명가이자 과학자,기업인이 된 신문배달원 에디슨의 삶의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그는 "상상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노력했고 내가 모은 팀과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술회했다.
◆혁신과 사회적 책임도 중시=다소가문은 국유화 조치가 취해질 때마다 다소가문은 더 강인해졌고 사업영역도 확장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1986년 마르셀이 94세로 타개하자 세르지가 경영권을 물려받았다.그는 1년에 400명만 들어간다는 명문 그랑제꼴인 에꼴 폴리테크니크와 유럽 최고 경영대학원인 HEC,아버지처럼 SUPAREO를 졸업했다. 경영과 항공기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췄지만 샤를 에델스텡이라는 전문경영인을 다소항공의 CEO로 앉혔다.최근에는 아들중 한명이 CEO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53살의 다소맨인 에릭 트라피에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는 또 1991년 라팔 전투기를 내놓았고 우주산업에도 뛰어들었다.2004년에는 일간 '르 피가로'를 인수해 피가로그룹을 만들었다.피가로는 훗날 프랑수아 올랑드 반대 선거운동에 동원됐다.
세르지는 올랑드 정부의 동성결혼 합법화 정책에 대해 "10년뒤에는 프랑스에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세금과 노동규제가 기업을 망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사회당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아버지처럼 '혁신'을 신봉하고 대충을 배격하는 '탁월함'을 중시한다.또 이익공유와 사회적 책임도 충실히 이행한다.다소가문이 재단을 설립해 심장병과 정신병 치료,과학연구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이유이다.이는 세르지의 카리스마 경영의 단점을 보완하는 전문경영인 체제와 함께 다소그룹의 장수비결로 꼽힌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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