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보고 5일째...정부부처 대상 '군기 잡기' 나서...공약 관련 정부부처와 곳곳서 갈등 고조돼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점령군' 행세는 하지 않겠다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초심을 잃고 있다. 박 당선인의 공약 이행과 관련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부 정부 부처들을 상대로 군기 잡기에 나선 것이다. 특히 인수위가 각 부처들에게 박 당선인의 공약 이행과 관련해 예산 절감ㆍ정책 방향 수정 등을 요구하자 해당 부처들이 "점령군 행세를 안 하겠다더니 똑 같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등 갈등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이와 관련 14일 서울 삼청동 소재 금융연수원에 차려진 인수위에선 보건복지부가 지난 11일 1차 보고에 이어 부랴부랴 추가 업무보고를 하는 진풍경이 목격됐다. 박 당선인이 "공약 이행 방안 등에 대한 보고가 부족한 부처에 대해선 추가 보고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는데 복지부가 첫 사례로 찍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지부가 첫 추가 보고 대상에 선정된 것은 지난 11일 업무보고에서 박 당선인의 '기초노령연금 100% 확대'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고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복지부는 당시 박 당선인의 기초노령연금 확대 공약에 대해 "연 14조원이 들어 간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복지부는 또 "조세 방식이 아닌 국민연금 적립금에서 일부를 조달하겠다"는 방안을 보고한 것이 알려지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국민연금을 떼어 내 노인들만 챙긴다"는 반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박 당선인의 진노를 산 것으로 전해졌다.
인수위는 복지부 외 박 당선인의 공약 이행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고한 부처들에게도 추가 업무 보고를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복지부 관계자는 "(업무보고가) 두 번째라기보다는 주요 사항에 대해 추가 보고를 하는 것"이라며 "다른 부서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기초노령연금 관련 보고가 첫 번째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인수위는 정부 부처들과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인수위는 '목돈 안 드는 전세'ㆍ주택시장 정상화 방안(국토해양부), 군 복무기간 단축(국방부), '고교 무상 교육' 실행 로드맵(교육과학기술부), 중수부 폐지(검찰), 10조원대 국민행복기금ㆍ금융정보분석원(FIU) 고액거래정보 접근권 확대(금융위원회) 등을 놓고 각각 해당 부처와 실행 여부 및 속도ㆍ재원 조달 방안 등을 놓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목돈 안 드는 전세' 공약에 대해선 국토부 측이 실효성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인수위 측은 전세금이 없는 세입자를 위해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금융권 대출을 받고 세입자가 이자를 내도록 하자는 방식의 제도를 도입하자는 입장이다. 집주인에게 이자상당액(4%)을 면세하고 전세보증금 대출이자 납입소득공제 40%를 인정하는 세제혜택을 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입장이지만 국토부 측은 양도소득세와 재산세 등 인센티브를 추가할 필요가 있어 세입 면에서 출혈이 크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최근 박 당선인의 '보유주택 지분매각제도'에 대해 "채권자와 채무자 문제해결 과정에 정부가 책임 당사자로 나서면 시장경제를 왜곡할 수 있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FIU의 고액거래 정보 접근권 확대를 통한 지하경제 양성화에 대해서도 금융위원회 측은 "실효성이 적고 사생활 침해ㆍ권력 남용 가능성 등 제도적인 문제가 많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인수위가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민행복기금 공약 추진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인수위는 임기 내 10조원대의 기금을 조성해 재활의지가 있는 채무자들의 빚을 감면해주겠다는 계획이지만, 도덕적 해이ㆍ형평성 문제를 들어 관련 부처들이 사실상 반대하고 있다. 관련 부처 및 전문가들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운영 부실화 우려가 높고,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채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군 복무 기간 단축도 국방부는 물론 여당 내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다. 군 복무 기간을 당장 21개월에서 18개월로 줄이려면 부사관 3만 명을 당장 충원해야 하는데, 이에 들어가는 예산이 연간 1조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에 대해서도 검찰 측은 업무보고에서 전면 폐지 대신 지휘기능 존치ㆍ일선 지검으로의 수사 기능 이전 등 대안을 내놓으며 사실상 '반기'를 든 상태다. 교육 분야에서도 중학교 자유학기제, 선행학습 금지 공약도 사교육 관련 단체 등 이해당사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교육부가 난색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인수위가 이 과정에서 '초심'을 잃고 해당 부처들에 대한 기강 잡기에 나서는 등 '점령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수위는 초반만 하더라도 정책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용하고 슬림한 인수위를 꾸려 전임 정부들과 달리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고 새 정책도 구상하지 않으며, 오직 차기 정부의 정책 로드맵 작성에만 주력하겠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이같은 인수위의 입장은 초기 부처 업무보고를 받은 박 당선인이 박선규 대변인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내비치면서 확 달라진 분위기다. 박 대변인은 지난 13일 "소극적으로 관의 입장에서 과거 관행에 기대어 문제를 그대로 유지해가려는 부분에 대해 박 당선인이 불편한 마음을 분명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인수위는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재원 조달의 어려움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각 부처들의 입장을 '부처 이기주의', '박 당선인 길들이기' 등으로 몰아 세우며 조속한 공약 이행 계획 마련을 강요하고 있다는 게 업무보고에 나선 정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실제 지난 13일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도 인수위원들은 '마른 수건 짜내기'라며 어려움을 호소한 재정부 관계자들에게 공약 이행 계획의 조속한 수립을 집중 추궁했다. 특히 현실적 문제를 들며 대안을 제시하려는 재정부 관계자들에게 "공약이 워낙 꼼꼼히 잘 짜여져 있기 때문에 일부 보완만 하고 실행 계획만 짜면 되는데 여태까지 뭘 했느냐"는 식으로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당선인과 인수위가 '말 안 듣는' 부처들에 대한 기강 잡기에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정부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 내에서도 비현실적 공약에 대해선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며 "박 당선인과 인수위가 공약 실현이라는 약속 실천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경제 위기ㆍ세수 부족 등 현실적 상황을 감안해 차분히 차기 정권 출범을 준비해야 된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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