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시행인가 받아놓고 철거 직전 공사 올스톱
[아시아경제 진희정 기자]#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한 아파트 재건축사업이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현금청산 문제 때문이다. 사업시행인가 단계에서 현금청산 접수가 완료됐다고 봤는데 철거공사를 앞둔 관리처분단계를 전후해서 재건축 된 주택 대신 현금으로 보상해달라는 요구가 늘어난 것이다. 일사천리 사업이 완료되기를 바랐던 조합원들은 현금청산 변수로 인해 공사착수가 늦어진다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재개발ㆍ재건축 등 정비사업 조합원의 확실치 않은 현금청산 요구 시한이 도마에 올랐다. 법규에서는 사업시행인가 단계에서 현금청산을 하도록 돼있지만 조합에서 활용하는 표준정관은 관리처분 단계에서도 가능하다고 서로 달리 규정한 탓이다. 현금청산이란 정비사업 조합원이 주택이 아닌 현금으로 보상받는 것을 뜻한다.
1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법과 표준정관이 현금청산 시한을 달리 규정, 아무때나 현금청산을 신청하면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를 둘러싼 분쟁이 적잖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암동 아파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사업추진이 늦춰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투자를 목적으로 조합지분을 매입한 이들은 막판까지 계약을 미루다 시장상황이 나빠지면 현금청산을 신청, 투기목적 투자자들을 위한 보호방안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적잖다.
현금청산 금액과 이에따른 금융비용 부담 증가로 정상적인 사업장마저도 지연 또는 중단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주택협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전국 10개 정비사업장의 현금청산 금액은 약 5728억원이다. 이 가운데 동대문구 답십리와 강남구 역삼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현금청산에 대한 보상비와 사업지연에 따른 금융비용이 사업비 증가의 주 원인이 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시공사 지급보증에 문제가 생겨 시공사 재선정 과정이 진행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뒤늦게 현금청산을 할 경우 다른 조합원들에게는 부담이 커지는 문제점까지 낳고 있다. 관리처분인가 신청 단계에 있는 한 조합 관계자는 "계약을 미루던 외지인 투자자가 무더기로 현금청산을 요구해 정착하려던 주민들은 청산비용 마련과 사업 지연 등의 손실을 감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은 법과 표준정관간의 상이한 규정 때문이다. 지난해 수차례 개정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 제47조제1항에 따르면 사업시행인가 이후 분양신청 기간 내 분양신청을 하지 않거나 신청을 철회한 조합원만 현금청산 대상이다. 그러나 10년전 제정돼 보급된 표준정관에서는 분양신청을 한 이후 관리처분계획인가가 난 상태에서 분양계약을 하지 않은 경우도 현금청산토록 하고 있다.
표준정관은 하나의 예시일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표준정관이 보급된 이후 대부분의 추진위원회들이 표준정관을 그대로 적용해 조합을 설립해왔다. 그렇다고 바뀐 법의 내용을 자유롭게 추진위나 조합들이 바꿀 수도 없다. 임의로 수정하거나 일부 조항을 삭제 또는 신설할 경우 집행부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에따라 법규와 표준정관을 일치시키는 작업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허명 부천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관리처분인가는 분양 대상자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단계로 여기서부터는 조합원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더라도 이미 계약이 성립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 단계에서 현금청산을 표준정관으로 보장한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조합 관계자 역시 "표준정관으로 인해 일선 사업장에서 혼선이 빚어져 민원이 늘어나고 있다"며 "정비사업이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신중한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표준정관은 법은 아니지만 추진위원회 등에서 개별적으로 요구할 경우 이메일 등을 통해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진희정 기자 hj_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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