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시애틀 타임즈’의 래리 스톤 기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시애틀 매리너스 취재를 위해 오후 2시 40분 세이프코필드에 도착했다. 스톤은 선수단, 구단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기자실로 올라갔다. 오후 3시 스톤의 뒷자리에 앉은 ‘뉴욕 타임즈’ 기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 이치로가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다고?”
기자실은 술렁거렸다. 스톤은 중계부스로 달려가 매리너스 경기를 중계하는 ‘루트 스포츠(Root Sports)’ 해설자 마이크 블로워스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다. 블로워스는 양키즈 경기를 중계하는 'YES 네트워크(Yankees Entertainment and Sports Network)' 중계진에 사실여부를 확인하여 이적이 확정됐음을 그에게 알려줬다. 블로워스는 스톤에게 말했다.
“구장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이치로의)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지. 처음엔 트레이드 마감(7월 31일)을 앞두고 돌아다니는 루머쯤으로 치부했어. 이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이때 스톤의 휴대폰이 울렸다. 켄 그리피 주니어였다. 그리피는 다짜고짜 “(이치로의) 트레이드가 사실인가? 그렇다면 양키스에서의 등번호는 몇 번인가?”라고 물었다. 스톤은 이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매리너스의 담당기자를 한 이후 가장 바쁜 하루였다. 양 팀 선수단을 취재하고 이치로가 어떤 선수였는지에 대한 특집기사를 쓰고 트레이드 후폭풍을 예상했다. (뉴욕 기자들에게) 이치로가 어떤 선수인가에 대한 답변도 해줬다. 그런 와중에 그리피를 비롯한 매리너스를 거쳐 간 많은 슈퍼스타들의 확인전화를 받았다.”
시애틀에서 시작된 트레이드의 충격은 이내 미국의 반대편에 위치한 뉴욕에도 전달됐다. 그 시각 시티필드에서는 뉴욕 메츠와 워싱턴 내셔널스의 경기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기자실은 양키스에 대한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뉴욕 데일리뉴스’의 존 하퍼 기자는 이날 경기장을 찾은 프리랜서 기자 스기우라 다이스케에게 말을 걸었다.
“이치로가 양키스로 트레이드됐데. 자네 앞으로 양키스타디움을 바쁘게 드나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 시각 세이프코 필드에서는 시애틀과 양키스의 경기가 플레이볼을 외쳤다. 3회초 양키스 공격이 시작되자 모든 관중들은 그라운드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장내 아나운서는 이례적으로 원정팀 선수를 소개했다.
“뉴욕 양키즈 8번 타자 우익수 이치로 스즈키!”
이치로는 주심과 매리너스 선수단에 양해를 구하고 타석을 벗어났다. 이치로는 1루, 백네트, 3루, 외야 네 군데를 향해 헬멧을 벗고 90도로 인사했다. 세이프코필드는 관중들의 박수소리와 카메라 플래시,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셔터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타석에 들어선 이치로는 매리너스 선발 케빈 밀우드의 2구째를 받아쳐 중전안타를 기록했다. 관중들은 바로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이치로는 다시 타임을 요청해 관중들에게 답례인사를 했다.
트레이드 당일 경기를 마친 이치로는 노코멘트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경기 시작 전 원정팀 클럽하우스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았다. 그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세이프코필드는 지난 12년간 익숙하게 드나들던 곳이다. 하지만 3루 더그아웃에 앉아 이닝 초 타석에 들어서고 이닝 말 수비에 나가는 건 꽤 낯설었다. (지금 기분은) 그냥 허공에 붕 뜬 것 같다.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더 이상 매리너스 선수가 아닌데도 어제 네 차례 타석에서 모두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환영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단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세이프코필드의 기립박수는 양키즈와 3연전이 진행되던 24, 25일 모두 멈추지 않았다. 이틀 동안 이치로는 첫 타석에 들어서기 전 관중석의 네 군데 방향으로 90도의 인사를 계속했다.
선택과 집중
시계를 11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2001년 애리조나에 마련한 시애틀의 스프링캠프. 구장에 모인 시애틀 담당기자들은 한 선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1312만 5천 달러의 포스팅 비용을 지불하고 영입한 이치로였다. 그는 시범경기에서 오릭스 시절 트레이드마크였던 시계추 타법으로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일본프로야구 최고타자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헛스윙과 범타 행진을 거듭했다. 그런 이치로에게 ‘시애틀 타임즈’는 비관적인 시즌 전망을 내놓았다.
“이치로는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에 배트가 나간다. 타격 자세(시계추 타법)도 이상하다. 타석에서 휘청거리는 것 같다. 공을 제대로 때리지 못 하고 두들기는 듯한 스윙을 하는데 동시에 1루 베이스를 향해 스타트를 끊는 타격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스타일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구위와 야수들의 수비 앞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9년간 118개의 홈런을 쳤다지만 시범경기에서 지켜본 바로는 파워도 전혀 없다.”
이런 생각은 감독인 루 피넬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넬라는 이치로의 예상 성적을 묻는 기자들에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타율은 2할8푼에서 3할 사이, 도루는 25~30개 정도 해줄 것 같다. 시애틀의 득점력을 향상시켜 주기는 할 것이다.”
시애틀 팬들의 불만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랜디 존슨이 사용했던 등번호 51번을 부여한 구단의 결정에 “시애틀에서 세운 존슨의 공적을 깎아 내리는 행위”, “존슨에 대한 모욕이다”라며 반발했다.
온갖 우려에 시달리며 맞이한 시즌. 이치로는 시범경기 때와 전혀 다른 타격 자세를 선보였다. 오릭스 시절 그는 약간 오픈 스탠스(Open Stance) 자세를 취한 뒤 타격준비 자세에서 양손을 가슴높이에 올렸다가 타격이 시작되면 오른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시에 양손을 귀 옆까지 활시위를 당기듯 장전(Load Position)해 배트를 휘둘렀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달랐다. 양발이 일직선상에 오는 스퀘어 스탠스(Square Stance) 자세를 취했고 손을 귀 밑에 두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가 장전 동작 없이 바로 스윙에 들어갔다. 스트라이드에서도 차이가 발견됐다. 일본에선 양발을 어깨 넓이보다 약간 넓게 벌리고 오른 다리를 높게 들었지만 미국에선 양 쪽 무릎을 안으로 집어넣고 오른 발을 열어둔 상태에서 오른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타격 폼이 간소해지자 안타는 끊임없이 생산됐다. 이치로는 4월과 5월 연이어 ‘이달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애틀은 물론 미국의 야구팬들로부터 주목도 받기 시작했다. 이치로는 그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337만여 표를 획득, 최다득표의 주인공이 됐다. 태평양 건너에서 던진 일본인들의 68만 표를 빼더라도 최다였다. 이치로에 대해 비관적인 기사를 썼던 기자들은 한 달 반도 지나지 않아 속속 사과 칼럼을 게재했다.
이치로는 242안타를 쏟아내며 타율 3할5푼을 기록, 데뷔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75년 프레드 린(보스턴 레드삭스) 이후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를 동시에 수상한 두 번째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현지 매체들은 이런 그의 단시간 드라마틱한 변화에 대해 ‘천재 타자’라며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사실 임기응변은 아니었다.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키운 건 1996년 미-일 올스타전. 당시 대회는 시즌 종료 뒤인 11월 열렸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올스타 투수들의 스피드는 상당했다. 이치로는 이때부터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때리려면 타격 폼의 간소화가 필요하단 것을 절감했다. 1999년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시애틀 스프링캠프에서 이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치로가 시계추타법을 고수했던 이유는 부족한 파워를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투수의 와인드 업을 연상시키는 하이 킥에 넓은 스트라이드와 큰 장전 동작을 동반한 스윙으로 체중이동과 회전력을 극대화시켰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다. 직구에 대한 타이밍이 늦고 떨어지는 변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이치로는 자국 투수들을 상대로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공을 맞추는 능력에 발군의 배트 스피드가 더해진 까닭이다. 하지만 두 번의 미-일 올스타게임(96, 98년)과 두 번의 메이저리그 시범경기(1999, 2000년) 경험은 그의 타격에 변화를 갖게 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와 날카로운 변화구의 수준은 일본리그보다 한 수 위였다. 더 이상의 시계추타법 고수는 실패를 뜻했다.
오기 아키라 감독은 그런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이치로가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보낸 2000년 그를 4번 타자로 기용, 장타 양산을 희망했다. 이치로는 바뀐 타격 폼으로 한 시즌을 뛰며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그해 타율은 자신의 커리어하이인 3할8푼7리로 매듭지어졌다.
ML의 높은 벽, 어떻게 넘어섰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치로에게 ‘2년차 징크스’란 없었다. 2002년 그는 전반기 85경기에서 128안타 타율 3할5푼7리를 남기며 승승장구했다. 1년 반 동안 370개의 안타를 헌납한 29개 구단들이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건 당연지사. 그들은 곧 “유레카”를 외쳤다. 몸 쪽 높은 공이었다.
이치로는 적극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타자다.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 공을 고르기보다 자신의 넓은 히팅 존을 극대화시키는데 초점을 둔다. 특히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듯 극단적인 다운스윙을 하는데 이는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흐르는 큰 바운드의 타구로 연결돼 곧잘 내야안타로 연결됐다.
투수들은 유리한 볼 카운트를 잡으면 내야안타를 피하기 위해 몸 쪽 높은 코스의 직구를 던졌다. 이치로는 특히 얼굴 쪽으로 날아드는 오른손 투수의 몸 쪽 높은 직구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약점이 노출되자 후반기 타율은 이내 2할8푼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시즌 타율은 3할2푼1리였다.
약점 공략은 이듬해 더욱 거세졌다. 내야수들까지 수비 위치 조절로 이치로를 압박했다. 그 탓에 이치로는 3월과 4월 치른 27경기에서 타율 2할4푼3리를 남기는데 그쳤다. 더 이상 내야안타 양산이 어렵다는 걸 깨달은 그는 곧 승부수를 띄었다.
내놓은 카드는 다소 의외였다. 장타자로의 회귀였다. 이치로는 히팅존을 좁히고 스윙 패턴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예전처럼 맞추는데 주력하는 스윙을 하면서도 상대 전적이 좋은 투수를 만나거나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선 장전 동작을 크게 가져가며 풀 스윙을 했다.
변화는 또 한 번의 기록 상승으로 연결됐다. 이치로는 5월과 7월 나선 79경기 359타석에서 타율 3할7푼3리 장타율 0.518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투수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게스 히팅 저지를 위해 몸 쪽 낮은 직구와 몸 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의 비중을 늘려나갔다.
조지 시슬러를 넘어서다
3년 연속 3할 타율 그리고 200안타. 누가 봐도 만족할 만한 성과지만 이치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2003년 겨울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대로 가다단 영원히 3할을 치지 못 할 것이란 위기감이 든다”라고 말했다. 다시 한 번 타격 폼을 변경하겠다는 예고였다.
이치로는 2004년 히팅 존을 좁게 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여기에 오픈 스탠스를 취하고 오른 발끝을 땅에 닿게 했다. 직구와 몸 쪽 공의 효과적 공략을 위해서였다. 변화는 하나 더 발견됐다. 양손을 조금 더 귀밑으로 끌어 올리고 배트를 눕혔다. 이때 배트의 헤드는 투수 쪽을 향했다.
세심한 변화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히팅 존을 좁게 설정해 스트라이크 존에서 터무니없이 빠지는 공에 배트가 나가지 않게 했다. 또 조금 더 빠른 스트라이드 이동으로 스윙에 들어가기 전 장전동작을 거의 없애 최단거리에서 공을 맞추는데 주력했다. 이때 스윙의 궤적은 고공과 배트가 만나는 면적이 가장 넓은 레벨스윙에 가깝게 했다. 단타 양산에만 집중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스트라이드 폭이 좁아지고 장전 동작이 거의 없어지며 생기는 추진력의 감소는 엉덩이 회전(Hip Turn)을 더욱 강하고 빠르게 가져가는 것으로 보충했다. 이로 인해 이치로의 스윙은 팽이가 강하게 회전하듯 리드미컬해졌다.
변화는 리그 평정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치로의 배트는 그라운드 이곳저곳에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262개로 1920년 조지 시슬러가 기록한 한 시즌 최다안타(257개) 기록을 84년 만에 갈아치웠다. 타율은 무려 3할7푼2리였다.
3년 만에 수위타자 복귀는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다. 시슬러의 기록을 갈아치운 다음날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전국지인 ‘USA 투데이’에 전면광고를 실어 이치로의 기록을 축하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전면광고를 내보낸 건 배리 본즈가 통산 700호 홈런을 때렸을 때 이후 두 번째였다. 버드 셀릭 커미셔너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여덟 번째로 이치로에게 ‘커미셔너 특별표창’을 선사했다.
②편에서 계속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자료를 제공해준 ‘야구세상’ 윤석구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종길 기자 leemea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