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4년차 배우가 스스로를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풋사과”에 비유하고 지금 이 순간을 “워밍업 단계”라고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지난해 MBC <로열 패밀리>의 재벌가 며느리와 올해 MBC <해를 품은 달>의 무녀를 통해 ‘탁구 엄마’로 대표되는 억척스러운 이미지에 새로운 색깔을 덧입힌 배우 전미선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저 여자는 저렇게 지고지순하게만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대중들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덕분에 애초 4회 정도로 예정된 KBS <제빵왕 김탁구> 출연분량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전미선은 자신의 노력을 화려하게 포장하기보다는 그 때 느낀 행복한 기분을 담담하게 설명할 뿐이다. 이제야 타인이 만들어놓은 알을 깨고 나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전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세상의 온갖 풍파에 흔들리지 말고 꿋꿋이 너의 길을 가라는 맏언니의 당부와도 같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대신 정성스레 쌓아 온 여배우들에게 바치는 ‘언니의 품격’ 세 번째 주자, 전미선이다.
“지금은 다양한 연기를 위한 전초전이다”
<#10LOGO#> SBS <다섯 손가락>의 송남주와 MBC <천 번째 남자>의 구미진이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캐릭터를 병행하고 있다. 힘들진 않나.
전미선: <천 번째 남자>에서 얻은 힘을 <다섯 손가락>에 쏟고 있다. (웃음) 만약 <다섯 손가락>만 했으면 너무 우울했을 텐데 <천 번째 남자>에서 받은 밝은 기운으로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초반에는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좋다.
<#10LOGO#> 가족밖에 모르는 현모양처 송남주는 그동안 많이 해왔던 지고지순한 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언뜻 KBS <제빵왕 김탁구>의 탁구 엄마 김미순도 연상되는데.
전미선: 기존에 했던 캐릭터와는 살짝 다르다. 탁구 엄마가 지고지순하고 <로열 패밀리>의 임윤서가 상류층의 도도함을 보여줬다면, 송남주는 그 중간에 위치한 여자다. 점점 감정기복이 심해지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센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한 게 아니라 거의 휘몰아치는 수준의 심한 감정기복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정말 어렵다.
<#10LOGO#> 반면 <천 번째 남자>의 구미진은 딸들 앞에서 덜렁대는 푼수 같은 엄마다. 전미선과 코믹 연기는 예상하지 못한 조합인데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전미선: 예전에 감독님을 만났을 때 말없이 조용히 있어서 과연 이 배우한테 코믹한 부분이 나올까 걱정하셨는데 막상 얘기를 해보니 은근히 엉뚱하고 입을 실룩거리는 재밌는 습관도 있더라고 하시더라. 덤벙거리고 편해 보이는 모습을 시트콤에 집어넣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내 실제 모습을 조금씩 가미시켰다. 그냥 평상시처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10LOGO#> 본인의 풀어진 모습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겠다.
전미선: 기대가 있었는데 편성 시간이 딱 금요일이라 아쉽다. (웃음) 그런데 어떻게 보면 시청자 분들이 많이 안 보시는 게 다행일 수도 있다. 스스로 억눌려있던 부분을 풀어주는 작업을 더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
“사소한 부분까지 스스로 깨는 작업을 했다”
<#10LOGO#> 확실히 예전보다 연기하는 캐릭터의 색깔이 다양해진 것 같다. <로열 패밀리>와 <해를 품은 달> 이후 들어오는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건가.
전미선: 앞으로 더 넓어져야지. 지금은 그것을 위한 전초전이다. 지금 하고 있는 두 작품도 잘 해낸다면 어떤 작품이 와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다섯 손가락>을 하면서 힘들지만 마지막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날 이렇게 힘들게 할까. 이 작품이 끝나면 내 모습이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LOGO#>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전미선: 어른이 될 것 같다. 지금은 배우로서 완벽한 어른이 되지 않은 느낌이다. 지금의 내가 풋사과라면 <다섯 손가락>을 끝내고 나면 잘 익은 사과가 될 것 같다. <로열 패밀리>와 <해를 품은 달>을 할 때는 사과의 3분의 2는 익은 부분과 덜 익은 부분이 섞여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완전히 떫은 상태였다. 이제 떫은 부분과 익은 부분이 잘 섞여야 할 텐데 여전히 연기하는 건 어렵다. 보는 사람들은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0.00001이라도 각도가 틀어지면 그건 다른 사람이니까.
<#10LOGO#> <로열 패밀리> 이전의 전미선은 단아하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게 사실이다.
전미선: 잠시 일을 쉬다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로 복귀한 후 12년 동안 열심히 연기했지만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 것도, 지고지순한 역할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런 캐릭터를 많이 기억해주시는 것뿐이다. 그리고 저 여자는 저렇게 지고지순하게만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다. “<제빵왕 김탁구>에서 지고지순했던 여자가 <로열 패밀리>에서 왜 악랄하게 변하냐”는 얘기도 들었다. 외국 배우가 변신을 하면 끝내준다고 칭찬하면서 우리는 틀에 가둬놓고 판단을 내린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연기해도 봐주는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다 똑같아 보인다. 단편적인 시선으로 보면 단편적인 모습만 보인다. 스무 살 때 봤던 영화를 서른 살에 보면 다르게 보이지 않나. 그건 영화가 아니라 내 시선이 달라진 거다. 주인공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뭔가가 생겼기 때문에 그 영화가 다시 보이는 거다. 시청자, 연기자, 감독의 눈이 열려있어야 다양한 작품,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10LOGO#>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으면, 직접 돌파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전미선: 스스로 조금씩 깨는 작업을 했다. <제빵왕 김탁구>도 원래 4회 정도 나오는 분량이었는데 그 틀을 조금씩 깨다보니 더 오래 살아남았다. 아무도 내가 4회에서 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전체적인 대본을 놓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주인공이 아니면 편집을 당할 수도 있고 내 위주로 찍어주지 않는다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혼자 이겨나가야 했다. 누구의 시선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것에 몰입하고 최선을 다하니까 곰팡이가 피듯 어느새 내 영역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깨고 나니 <로열 패밀리>의 감독, 작가님이 기회를 주셨다.
<#10LOGO#> 굉장히 외로운 작업이었겠다.
전미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힘들었지. 하지만 내가 참아낸 눈물이 행복으로 다가왔을 땐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아, 이래서 연기를 하는구나.
“속 빈 강정 같은 캐릭터엔 손이 안 간다”
<#10LOGO#> 스스로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인물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많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접근하는 편인가.
전미선: 사람의 본질은 원래 착하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지, 태어날 때부터 못되게 태어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접근한다. <다섯 손가락>의 송남주는 처음엔 너무 지고지순하다가 중간엔 또 너무 확 바뀌는데, 사실 적응이 안됐다.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회사 앞에서 막 소리 지르고 싸우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 자식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살지 않나. 그런 걸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더라. 송남주도 한 번 지를 수 있겠구나.
<#10LOGO#> 첫 주연작이었던 영화 <연애>의 어진을 이해하는 과정은 어땠나. 결혼하지 않은 여배우로서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평범한 기혼녀의 삶을 연기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전미선: 옛날부터 ‘천한 직업, 그렇지 않은 직업이 따로 있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여자가 처음부터 술집 여자도 아니었고 술집에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을 천하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먹고 살기 위해 꼭 술집을 나가야 되나, 다른 일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도 <연애>를 찍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볼 수 있고, 그 중 하나가 술집이었던 것뿐이다. 그 아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술집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어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사람이었다.
<#10LOGO#> 모든 캐릭터에서 사람으로서의 매력이나 아픔을 발견했나.
전미선: 아무 매력이 없으면 손이 안 간다. 출연하고도 후회한다. 그런 적이 한 세 번 정도 있었다. 어렸을 땐 주인공 섭외가 들어와도 아무 매력이 없는 속 빈 강정, 내가 아닌 어느 누가 해도 할 수 있는 캐릭터 같으면 과감하게 거절했다. 물론 돈을 벌고 싶었지만 그렇게 연기하고 싶진 않았다.
<#10LOGO#> 배우는 선택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었나.
전미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역할이라도 할 걸, 연기도 못하는 애가 뭘 가린다고 싶다. 하하. 그 땐 오만방자했다. 똥고집이었지. (웃음) 그래서 지금 그것을 탈피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하고 싶은 연기만 하면 그게 무슨 연기자야. 진짜 그런 연기밖에 못하는 사람이 돼버릴 수도 있다.
“내지르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부럽다”
<#10LOGO#> MBC <에덴의 동쪽>이 종영될 즈음에야 아들 역의 연정훈에게 말을 놓을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나.
전미선: 어렸을 때 엄마가 정말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집-가게-학교만 왔다 갔다 했고 친구집은 물론 친척집에서도 못 잤다. 집안에서는 완전 푼수였는데 밖에만 나가면 사교성이 없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읽을 때도 부들부들 떨다가 쓰러질 정도였다. 무용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사시나무 떨듯 긴장하고 설사를 하던 애가 무용 선생님이 엉덩이를 탁 쳐주면 무대에 나가서 신나게 했다. 순서가 틀려도 자기 마음대로 추고 들어왔다고 하더라. 무대 체질이었다.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를 보고 연기하는 건 되게 편했는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외적인 작업이 너무 힘들었다. 엄마한테 자식을 우째 이렇게 키우셨냐고 얘기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평범하게 살면 이런 성격도 괜찮은데 이 일을 하기엔 정말 안 좋은 성격이다.
<#10LOGO#> 이젠 선배보다 후배들이 더 많아진 입장일 텐데 성격상 먼저 다가가서 조언해주는 타입은 아니겠다.
전미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숙제는 <다섯 손가락>에서 아들, 딸로 나오는 후배들에게 잘해주는 거다. 애들도 나한테 다가오고 싶을 텐데 내가 너무 조용하니까 얼마나 힘들겠나. 이젠 안 그러고 싶은데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연기 얘기만 하면 불편해 할 테고. 옛날에는 선배님들이 더 불편했는데 지금은 어른들이 너~무 편하다. (웃음) 애들하고 연기하면 내가 주도해서 뭔가를 해줘야 하는데, 선배님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막내니까 물어보면 가르쳐주시고 연기하면 다 받아주시고.
<#10LOGO#> 레저 스포츠를 즐길 정도로 과감하지만 그렇다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아닌가보다.
전미선: 그래서 툭툭 내뱉고 지르는 연기를 잘하는 여배우들을 보면 부럽다.
<#10LOGO#> 이를테면 <로열 패밀리>에 함께 출연했던 염정아 같이?
전미선: 걔는 평상시에도 거침이 없다. 하하. 정아는 나에게 밝은 기운을 많이 준다. 어디서 그렇게 에너지가 나오느냐고 물어보면 자기 에너지 좀 가져가라고 얘기한다. 희한하게 내 주변에는 다 밝고 거침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좀 바뀌어야 되는데 바뀌는 속도가 많이 느린 편이다.
<#10LOGO#> 최근 채시라, 염정아처럼 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또래 여배우들이 많은데, 지금은 워밍업 단계에 불과하다고 얘기했지만 나중에라도 주인공을 맡고 싶은 욕심이 있나.
전미선: 그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주어져야 하는 거다. 옛날에는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많이 비웠다.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더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거기까지만 연기하게 된다. 내가 그런 그릇이 안 되는데 무리해서 하다가 질타 받는 것보다는 내가 그런 그릇이 되고 누군가가 날 불러줬을 때 잘 수행하면 되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기회가 오길 바란다.
<#10LOGO#> 연기에 지쳐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고 대중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깨면서 20년 넘게 연기를 해왔는데 앞으로의 20년을 상상해본다면.
전미선: 정말 성숙한 여자를 연기하기 위해 해야 될 게 너무 많다. 성숙미, 노련미, 여성미가 딱 맞아떨어지는 날이 있을 거다. 도를 닦고 있어야지. 기회는 늘 오니까 기회를 잡기 위해 내 그릇을 채워나가는 게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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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가온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10 아시아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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