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진 기자] 십 수년 전 일이다. 국내 대형 철강회사 직원 A씨는 매월 한 차례꼴로 자기 회사 제품을 사다쓰는 중견기업 B사에 들르곤 했다.
고참 대리급이었던 A는 B사에 방문할 때마다 으레 대표이사 방으로 직행하곤 했다. 당시 A가 가진 권한은 그 정도로 막강했다. 심기가 불편한 날은 A가 대표이사 사무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B사는 A가 다니는 회사로부터 연간 1000억원에 가까운 제품을 사다 썼지만 이른바 철저한 '을'이었다. A가 방문하는 날이면 B사 구매담당 간부들은 저녁부터 한밤중까지 약속을 비워놓고 그를 맞이해야만 했다.
A가 다니는 회사는 국내 제조업체에 해마다 수 조원 어치씩 제품을 팔았다. 그런데 굳이 영업을 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이 회사에서는 '영업'이라는 간판을 단 부서 명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A가 근무하는 회사는 몇 년 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시스템 선진화와 전산화 작업을 했고 이후 불편한 관행은 상당부분 사라졌다. 아직도 A가 그곳에 근무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회사는 지금 글로벌 기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오래 전에 만났던 C조합 이사장의 단골메뉴는 '납품단가 현실화'였다. 원자재 가격이 오를 때만 되면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그의 레퍼토리는 10년 넘게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납품단가 현실화의 길은 통일 문제처럼 요원한 것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 10곳 가운데 5곳 이상은 여전히 원자재가격 인상분을 납품단가에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놨다. 대기업 납품기업 200곳을 조사한 것인데 응답한 중소기업의 84.3%는 '지난해보다 주요 원자재 가격이 올랐다'고 답했지만 '오른 원자재 가격이 납품가에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0곳 중 한 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부 반영되고 있다는 응답은 3곳 중 한 곳이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56.2%는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올 초 레미콘 기업들이 4년 만에 다시 조업을 중단하는 일이 발생했다. 원자재(시멘트) 가격은 크게 올랐는데 건설업체에 공급하는 납품단가는 요지부동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봉합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중견ㆍ중소기업에 몸담고 있는 대기업 퇴직 임원들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대ㆍ중소기업의 거래 관행은 반발짝 정도 밖에 전진하지 못한 것 같다. 총리까지 지낸 인사가 지난 2년간 동반성장을 부르짖다 갔지만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2012년. 그 사이 강산은 한 번 변했고 밀레니엄 세기가 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옛날 얘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김민진 기자 asiak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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