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이중섭ㆍ천경자ㆍ박수근. 한국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3인방이다. 작가가 유명세를 탈수록 위작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림이 '돈'이기 때문. 그러나 가짜 그림으로 판정받는 순간 작가의 권위나 가치는 시장에서 그만큼 밀려나는 운명이 된다. 미술품 수요자들이 그 작가의 작품을 믿고, 구입할 수 없어서다.
이 3인방도 위작논란에서 비켜가지 못했다. 이중섭 그림은 그의 둘째아들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씨가 지난 2005년 3월 미술품 경매회사에 내놓은 '아이들Ⅰ', '아이들Ⅱ', '사슴', '가지', '물고기와 아이' 등 8점이 그해 10월 가짜로 밝혀졌다.
1991년 4월에는 작가 자신이 되레 위작이라고 주장하며 '진품'이라고 판정하는 감정위원들과 부딪혀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바로 천경자의 '미인도' 사건이다. 천 화백은 이 사건으로 절필을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나 이 작품의 진위는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았었다가 1999년 위조범이 직접 양심선언하게 되면서 위작임이 밝혀진바 있다.
가짜 그림 논란에서 최근까지 큰 화두가 됐던 그림은 단연 박수근의 '빨래터'다. 이 그림은 서울옥션에서 지난 2007년 5월 45억2000만원에 거래됐다. 그러나 미술전문지 아트레이드는 '짝퉁 의혹'을 받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논란이 야기됐다.
이에 대응해 서울옥션이 아트레이드에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면서 2년 이상의 지리한 법적공방을 이어갔다. 서울옥션 측 변호 감정단은 원 소장자인 미국인 존 릭스란 사람이 1954년부터 2년간 한국에 있을 때 박 화백으로 부터 받았다던 그림이라고 했지만, 아트레이드 측은 그림의 표현기법이 박 화백의 기존 그림과 비교해 색다르고 보존상태가 존 릭스가 보관하고 있다는 다른 작품들보다 너무 완벽해 위작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지난 2009년 11월 법원은 서울옥션의 소송에 기각판결을 내리며 "그림은 진품으로 추정되지만 위작 의혹을 제기할만한 근거가 있어 정당한 언론활동에 해당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빨래터 논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트레이드의 주장을 뒷받침한 과학감정 전문가인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장(명지대 보존과학과 교수)은 인터넷 사이트 '스터디 빨래터'를 조직해 지난해까지 과학감정의 근거를 가지고 위작임을 주장한 바 있다. 최 교수는 여전히 이 그림이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다.
소송이 일단락된 지 2년이 흘렀다. 문제작 '빨래터'는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16일까지 열리는 서울 롯데갤러리 잠실점 개관전 '변화의 시대, 불멸의 화가'전에 전시되고 있다. 이곳에 일하는 한 큐레이터는 "이 작품은 판결 이후 한 차례 소집된 감정인들이 재차 진품으로 규정했고, 갤러리 개관을 기념해 '판매' 목적이 아닌 '전시'를 위해 소장자에게 부탁해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위작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근현대미술품 외에도 고미술은 작자미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짜논란이 더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거액의 뇌물을 받고 고려청자의 감정가를 부풀린 혐의로 경기도 자박물관 전 관장인 최 모씨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위작논란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미술시장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미술품을 '투기'로 보는 일부 수요자들의 인식 ▲ 감정시스템의 부재를 꼽았다.
◆'수요자'인식이 문제= 전문가들은 가짜 그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유로 수요자들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비싼 돈을 주고 사서 그보다 고가에 팔아 이윤을 남기려는 일부 수집가(콜렉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짜그림시장이 활개를 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최명윤 소장은 지난 2007년 10월 검찰이 발표한 2800여점의 이중섭ㆍ박수근 위작사기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삼성 비자금 특검팀으로부터 고가미술품 '행복한 눈물'의 검증을 의뢰받기도 했다.
최 소장은 "감정의견이 갈릴 수 있는 그림은 남의 눈을 가지고 판단해 사들이는 게 아니다"라면서 "해당 작가의 작품에 대한 꾸준한 연구가 뒷받침 돼야하는데 무조건 대출받아 그 이자 돈보다 더 높은 양도소득을 원하는 투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중섭 그림들처럼 유족조차도 위작시비에 개입돼 있는 데다 미술품의 시대ㆍ작품별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해 감정이 더욱 어려운 현실이다.
미술품 진위 감정은 안목감정과 과학감정으로 나눠지는데, 안목감정이란 작품을 오랜 시간 접한 사람의 감식안으로 그 작가의 화풍과 색감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과학감정은 엑스레이, 가시광선 등을 이용한 기계적 방법을 동원해 작품재료인 물감이나, 틀인 나무의 제작연대와 성분분석을 살펴보면서 진위를 가리는 작업이다.
최 소장은 "현재까지는 안목감정에 과학감정이 설득력을 부연해주는 정도이지만, 과학감정이 더 정교해지면 감정의 정확도가 더 높아질 것"이라면서 "우리나라 감정기술은 해외에서 문의해 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외국과 비교해 크게 뒤떨어지는 편은 아니지만, 감정인력 양성에 대한 관심이나 전문가 권위를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부족한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감정시스템 미비, 연구인력 양성 무관심= 최 소장의 말처럼 감정시스템 부재에 대해서는 미술시장과 정부 모두 인정하고 있다. 현재 감정을 주로 담당하는 곳은 화랑이나 고미술상 관계자들 위주로 구성된 협회 안에 마련돼 있어 모순을 갖고 있다. 즉 상품을 사고파는 사람이 감정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근현대미술은 화랑협회 소속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고미술은 고미술협회가 주로 감정을 담당하고 있다. 감정비용은 30만원 안팎이다.
전 한국미술품감정협회 회장이자 유화감정 전문가 윤범모 동국대 교수는 "미술품이 몇 억대인 경우도 많은데 고가품 감정에서는 감정인들이 오히려 위험부담이 커 감정을 잘 하려들지 않는다"면서 "5~6년 전 문화체육관광부가 미술품 감정발전위원회 테스크포스(TF)를 구성했지만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시장에서 감정을 맡고 있는데 이해관계자들이 조직한 감정기구는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윤 교수는 "미술사학자와 감정전문가들을 많이 길러내야 하고, 장기적이고 구조적으로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연구기금을 만들어 지속해 제대로 된 감정이 될 수 있는 그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거래와 관련한 법률 자문을 하는 법무법인 기쁨 최한신 변호사는 "인력양성도 자격증 제도의 도입과 인턴쉽 등 감정연구 수련을 거친 후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근 정부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기증유물에 대한 감정위원회를 시범으로 구성해보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은 "아직까지 시장보다는 연구나 학술만을 위주로 사업을 벌여왔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유물이 들어올 때 감정시스템을 더 확충해야한다는 필요가 있어 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기증유물은 박물관마다 그 사례금으로 작품가의 0~20% 수준이 지급된다. 1억원 가치라면 최대 2000만원이 기증자에게 지급돼, 기증 미술품에 대한 감정역시 중요하다.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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