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황준호 기자] 한국형 바다 위의 호텔은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낮은 평온하고 따뜻했다. 반면 밤은 격조가 있으면서도 흥분을 자아냈다. 잔잔한 바다는 그대로인데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다. 1박2일간의 크루즈체험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다만 까다로운 한국사람 입맛을 맞추면서도 크루즈 고유의 문화를 살릴 수 있을지가 관건인 것으로 보였다. 놀거리가 부족한 한국에서 크루즈산업의 성장 가능성은 타진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입맛 맞추기는 그리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낮 "놀거리 가득한 크루즈"= 지난 1일 오전 10시30분께 부산 크루즈여객터미널에 닿았다. 멀리 아파트가 누워있는 듯한 배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세히 보니 축구장 두 개 길이의 배 한 척이다. 길이 176m, 폭 26m다. 겉에는 경쾌하게 '하모니 크루즈'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1박2일간의 일정동안 부산 앞바다를 배회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게 했다.
내부를 들어가는 입구는 호텔 로비인 줄 착각하게 만든다. 레드 카펫을 따라 승선하니 정복 차림의 직원들이 정렬해 반겼다. 대부분이 동남아 사람들이었다. 간간히 섞인 한국 사람들이 한국 말로 수속 절차를 안내했다. 여권을 내고 방열쇠를 받았다.
크루선의 방은 쉽게 모텔급부터 시작해 호텔급까지 나뉘어 있다. 총 383개의 방에서 최대 1000명이 묵을 수 있다. 객실은 7층 스위트룸을 제외하고는 5층부터 2층까지 배치됐다. 방안은 아늑했다. 화장실은 약간 비좁은 듯 느껴졌다. 변기에 똑바로 앉기가 힘들 정도였다. 배가 가지는 공간적 한계이리라.
이어 6층으로 향했다. 6층부터 8층까지는 각종 바와 카지노, 클럽, 공연장, 키즈클럽, 면세점, 커피전문점, 야외수영장, 뷔페, 사우나, 헬스클럽, 등이 자리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전천후 테마파크인 셈이다.
선내를 둘러보고 나자 점심식사가 시작됐다. 5층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크리스탈 장식이 눈부셨다. 흰백색의 옷을 차려입은 웨이터들은 친절했다. 음식은 정갈했다. 쉐라톤워커힐 주방장 출신이 만든 음식은 신선하고 깔끔했다. 최고의 재료를 공수해주지 않으면 크루즈선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고 한 그의 다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점심은 느긋하게 2시간30분을 기다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을 실감했다. 한국 사람의 급한 성미를 맞추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레스토랑에는 4인 규모 식탁은 적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앉을 수 있도록 테이블이 정리돼있다. 개인, 가족, 직장인 등 누가 오더라도 합석을 하는 불편함이 있을 듯 했다. 하지만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10일까지 배 안에서 같이 지낸다면 2시간여 식사는 오히려 사교의 촉매제가 될 수도 있으리라. 조용히 빠르게 식사를 해치우고 싶다면 7층 뷔페도 이용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치자 안전교육이 시작됐다. 크루즈에 타면 반드시 거쳐야할 절차다. 승객 모두가 객실내 구명조끼를 들고 공연장에 모였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사용법을 익힌 후 방으로 향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동안 잊어버린 한 가지가 퍼뜩 떠올랐다. 현대인의 필수품, 핸드폰이었다. 급하게 열어보니 수신 불능이었다. 배안에서는 통화가 어려웠다. 지인과 같이 왔거나 알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객실내 전화를 사용해야 했다. 인터넷도 원활하지 않았다. 크루즈에서는 일상의 업무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밤 “낮보다 아름답다”= 크루즈가 출발했다. 얼마간 흔들림이 이어졌다. 6층 해리스 바에서는 재즈공연이 펼쳐졌다. 흑인 여성 보컬의 파워풀한 음색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녁이 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갈라 디너를 진행하오니 의상이 필요하신 분은 6층 카지노로 오세요"라고 한다. 의상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10분 뒤 살짝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객실을 나서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 영화제 등 시상식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남성들도 가세했다. 턱시도에 나비 넥타이를 한 사람들이 보이더니 식사가 중반에 접어들자, 빤짝이 외투에 가발까지 쓴 승객들까지 등장했다. 나름 격을 갖춘 식사가 진행했다.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크루즈를 처음 타보는 사람에게는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다소 어색한 장면이었다.
이어 한류공연이 시작됐다. 그룹 '메리지'가 소녀시대 등의 그룹을 흉내내며 각종 공연을 펼쳤다. 공연은 다양했다. 하지만 연령층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관객과의 호흡을 보완할 필요성이 엿보였다. 무대시설은 흠잡을 곳 없었다.
6층 바(Bar)에서는 볼룸파티가 열렸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끼리 손을 맞잡았다. 가면이 쓴 그들은 서로 파트너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했다. 춤사위는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다른 바에서도 흥겨운 공연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흥에 겨워 엉덩이를 들썩이기도 했다.
10시를 넘어서자 클럽에서 강렬한 비트가 흘렀다. 가면을 썼거나 얼굴을 드러낸 사람들이 밤새 어울렸다. 밤이 깊어지자, 승무원들도 가세했다. 재즈 팀도, 한류 공연팀도 합류했다. 연령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게 하려는 듯 DJ의 세심한 선곡이 돋보였다.
뜨거운 열기에 땀이 흘렀다. 클럽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자쿠지(Ja cuzzi 욕조)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끝없는 바다가 펼쳐졌다. 탑승한지 12시간이 넘는 동안 바다를 잊고 있었다. 아니 어디로 가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와는 또다른 개념의 여행이었다. 여행길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여행의 즐거움이 시작됐었다. 만약 정규 일정이라면 내일이면 일본이나 중국 등 목적지에 닿았을 것이다. 3박4일 정도의 단기 여행이라면 크루즈도 괜찮을 듯 싶었다.
한희승 하모니크루즈 회장은 부산과 일본 후쿠오카를 오가는 첫 상업운항을 2주 후인 16일로 결정했다. 보완할 수 있는 점을 최대한 보완해 상품을 내놓겠다는 의지다. 한 해 최고 10만명을 유치하겠다는 그의 야심이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황준호 기자 rep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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