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C";$title="";$txt="1948년 제14회 런던하계올림픽[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size="550,446,0";$no="2012010209232465676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체육계에는 특별한 의미의 해이다.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다. 7월 27일(현지시간)부터 8월 12일까지 열리는 제30회 하계올림픽의 개최지인 런던은 한국 스포츠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올림픽무대에 발을 내딛은 도시이다.
1948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제14회 런던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지구촌에 알렸다. 이 대회에서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과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은 각각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에서는 40km 지점까지 선두였던 최윤칠이 근육통을 일으키며 기권하는 바람에 1936년 베를린 대회의 손기정에 이은 올림픽 2연속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출전하지 못한 가운데 한국은 아시아 나라로는 인도(금메달 1)에 이어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이에 앞서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만으로 이뤄진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이 대회에서 남자 1500m에 출전한 이효창은 19위를 차지했고 최용진과 이종국은 각각 31위와 36위에 이름을 올렸다.
두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모두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다. 하지만 그 시기는 엄격하게 말하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단이 아닌 한반도에 있는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선수단이었다.
그렇다면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 선배 체육인들은 어떻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까. 시계는 반세기를 거꾸로 돌아간다. 조선체육회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년 앞으로 다가온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 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경기 단체가 구성돼 있는 육상과 축구,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 6개 종목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내 아마추어 규정과 함께 각각의 국제경기연맹에 제출해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1920년 7월 탄생한 조선체육회는 이때까지만 해도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pos="C";$title="";$txt="";$size="550,279,0";$no="2012010209232465676_4.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그런데 1947년 6월 15일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를 앞두고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올림픽 참가 자격을 승인받으려고 출국한 전경무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전경무 부위원장을 대신할 인물로 미국에 있는 이원순을 지목하고 그에게 급히 전문을 보내 IOC 총회에 참석하도록 했다. 이원순은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6월 20일자로 KOC가 IOC의 회원으로 승인을 받는데 성공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KOC의 초대 위원장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맡았다. 선배들의 발 빠른 움직임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올림픽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선수단 규모는 물론 어떤 종목을 올림픽에 보내느냐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948년 6월 21일 종로 YMCA 회관에 모인 선수단은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축구, 농구 등 7개 종목 67명이었다. 이들은 서울역까지 도보로 행진해 기차에 오른 뒤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후쿠오카에 당도했다. 선수단은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에 도착해 바로 홍콩행 배에 몸을 실었다. 홍콩에서 런던까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했다. 비행기는 방콕과 캘커타, 아테네, 로마, 암스테르담 등을 모두 거친 뒤에야 런던 땅에 착륙했다. 힘들고 어렵게 닦아놓은 올림픽의 길을 후배들은 64년 만에 다시 밟게 됐다.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런던 올림픽은 이미 총성을 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선 출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전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까닭이다. 본선에서의 성적은 그 다음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여자 하키, 남녀 핸드볼 등 이미 여러 종목에서 본선 티켓을 확보했다. 최근 경기력으로 볼 때 직전 대회인 2008년 베이징 올림픽(금메달 13 은메달 10 동메달 8) 수준의 성적을 기대해 볼 만하다. 200여 개 나라 1만5000여명의 선수가 출전해 26개 종목에서 302개의 금메달을 놓고 기량을 겨루게 될 런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13개를 목표로 세워놓았다. 양궁과 유도, 태권도에서 각각 1∼3개, 사격과 역도에서 각각 1∼2개, 그리고 수영과 배드민턴 등에서의 금 소식을 기대하고 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include $docRoot.'/uhtml/article_relate.php';?>
<ⓒ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
이종길 기자 leemean@
<ⓒ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newsva.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