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함께 올해 축구 국가 대표팀에서 물러난 이영표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미국 프로축구(MLS)에서 보낸다. 이영표의 에이전트사인 ㈜지쎈(대표 김동국)은 지난 6일 “이영표가 캐나다에서 현지시간으로 5일 밤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와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지만 추가로 1년을 연장할 수 있는 옵션 조항을 뒀다”라고 밝혔다. 연봉 등 세부 계약 조건은 양측의 합의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다.
이로써 이영표는 여섯 리그를 경험하는 특별한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그간 안양 LG(현재 FC 서울), PSV 에인트호벤(네덜란드), 토트넘(잉글랜드), 도르트문트(독일), 알 힐랄(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영표가 입단하는 밴쿠버는 9개 구단으로 이뤄진 MLS 서부 콘퍼런스에서 올 시즌 6승 10무 18패(승점 28점)로 꼴찌에 그친 약체다. 콘퍼런스 1위인 로스앤젤레스 갤럭시(승점 67, 19승10무5패)와의 승점 차이는 무려 39점이다.
밴쿠버는 내년 시즌 수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계 여러 리그를 두루 경험한 이영표를 영입한 것으로 보인다. 밴쿠버는 올해 27명의 선수단을 꾸려 시즌을 치렀다. 연고지는 캐나다 서부 지역인 밴쿠버지만 정작 캐나다 국적의 선수는 달랑 4명뿐이다. 미국 선수가 13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3명의 골키퍼는 모두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 공격진에는 캐나다 선수가 한 명도 없다. 미국 선수가 2명이고 감비아, 세인트 키츠 앤드 네비스, 중국, 프랑스, 브라질 선수가 각각 1명씩 포진해 있다. 박찬호(한국)-노모 히데오(일본)-이스마엘 발데스(멕시코)-페드로 마르티네스(도미니카공화국)-대런 드라이포트(미국)로 구성됐던 1990년대 중반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다국적 선발진이 연상된다.
미드필더진에는 미국, 캐나다 선수가 각각 3명씩 있다. 스위스와 가나 출신도 1명씩 포함됐다. 이영표가 가세할 수비진은 미국 선수 5명에 캐나다, 뉴질랜드, 스위스, 트리니다드토바고 선수들로 짜여졌다. 신기하게도 유럽과 북중미-카리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오세아니아 등 국제축구연맹(FIFA) 산하 모든 대륙 연맹 소속 나라의 선수가 모두 모여 있다.
MLS는 홍명보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이 2002, 2003시즌 로스앤젤레스 갤럭시에서 뛰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해 국내 팬들에게 꽤 친숙한 리그다.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NASL(North American Soccer League)에는 1970년대 국가 대표인 조영증, 김황호 등이 진출해 활약했다.
북미 대륙은 오랜 기간 축구 불모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창설 대회인 1930년 월드컵(우루과이)에서 파라과이와 벨기에를 각각 3-0으로 물리치고 4강에 올랐다.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는 잉글랜드를 1-0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뒤에는 지역 경쟁자인 멕시코와 캐나다 그리고 중미의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에 밀려 번번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 대회부터 미국은 다시 월드컵에 개근하고 있다. 1994년 미국대회 16강, 2002년 한·일대회 8강,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대회 16강 등 성적도 꾸준하다. 11월 현재 FIFA 랭킹은 34위. 32위의 한국보다 2계단이 더 낮다. 물론 FIFA 랭킹은 특정 국가의 축구 실력을 100%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한때 10위권 내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30여 년 전 북미 대륙에는 한바탕 축구 붐이 일었다. 1971년 창설된 박대통령배대회는 1970년대 중반부터 초청 팀을 아시아권에서 세계로 넓혔고 외국의 유명 클럽이 많이 출전했다. 그 가운데에는 NASL의 워싱턴 디플로메츠도 있었다. 1978년 대회에 출전한 워싱턴은 국가 대표 1진인 화랑과 조별 예선과 결승에서 만나 각각 2-3, 2-6으로 졌다. 하지만 국내 미국 축구를 알리는 첫 계기가 됐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 NASL을 조직하고 1970~80년대에 걸쳐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조지 베스트 등을 영입해 축구를 뿌리내리기 위해 애썼다. 거스 히딩크 감독도 1970년대 중반 워싱턴 디플로메츠 등 NASL에서 뛰었다. NASL은 1970년대 후반 절정기를 누렸다. 조영증은 1983년 국내 프로 축구 출범과 함께 돌아오긴 했지만 1981년 국가 대표팀에서 물러나 포틀랜드 팀버즈에 입단, 1년 뒤 시카고 스팅즈로 이적하며 NASL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활약했다.
NASL은 1980년대 들면서 구단 확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데다 선수들의 치솟는 몸값을 버티지 못해 1984시즌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뒤로 다시 일기 시작한 축구 붐에 힘입어 1993년 12월 MLS가 출범했다.
그때 이후 많은 우수 선수들이 유럽의 여러 리그로 진출하며 실력을 길렀다.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진 랜던 도너번은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르 레버쿠젠에서 뛰다 MLS의 로스앤젤레스로 옮겼고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에버턴으로 임대 이적해 활약했다. 올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뛰었다.
MLS는 유럽의 상위권 리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수준 이하의 리그도 아니다. 홍명보와 이영표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삼을 정도의 수준은 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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