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프로축구 울산 현대의 센터백 이재성(23)은 올 한해 극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국가대표 중앙수비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소속팀에서는 프로데뷔 첫 준우승도 경험했지만 주위의 평가는 미온적이었다. 지난 8월 한·일전을 통해 A매치 공식 데뷔전을 치른 그는 0-3 참패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낙인찍히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K리그 챔피언십에서는 미숙한 경기 운영으로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 잇따라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 2009년 수원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재성은 드래프트 1순위로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당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정규리그 뿐 아니라 FA컵,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등 큰 경기에 꾸준히 선발출전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2010년 갑작스럽게 울산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한동안 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어렵게 마음을 추스르고 소속팀의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한 그에게 조광래 전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거침없는 성장 가도를 달리며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기대를 모으는 이재성이 축구팬들과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즌을 마치고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들어봤다.
◇ 상처뿐인 영광
“원래 힘들어도 주변에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이는 스타일이에요. 사람들 만나는 것도 그렇고 인터뷰 요청에 응하기도 불편하고요.”
이재성은 갑작스럽게 이슈가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지난 8월 일본과의 평가전은 이재성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사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님께 발탁돼 대표팀에 잠깐 들어갔어요. 그때는 경기에 나갈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경험만 하고 오자 생각했죠. 그러다가 조광래 감독님이 대표팀에 다시 뽑아주셨죠. 솔직히 한·일전 때 크게 실수한 건 없었어요. 결과가 워낙 안 좋다보니 욕도 많이 먹고 대표팀에 들어간 타이밍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요. 일본한테 졌던 건 실력차이는 아니었고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느 날은 볼을 대충 차도 패스가 되는 게임이 있고 정확히 보고 차도 안 되는 경기가 있잖아요. 일본 홈인데다 골을 너무 쉽게 내준 것 같아요. 사실 (이)정수(알 사드) 형이 실수는 더 많이 했는데 저한테만 비난이 쏟아지고(웃음). 그래도 그런 경험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 같아요.”
◇ 나는 수원의 1순위다
서울 잠원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이재성은 축구 명문 동북중학교와 동북고를 거쳤다. 중학교 3학년 때 중앙수비로 포지션을 변경해 줄곧 센터백을 맡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2년 위인 이상협(대전) 선배한테 헤딩을 못한다고 엄청 구박 받았어요. 제가 스피드는 있는 편인데 제공권이 약했어요. 프로에 와서도 공중볼 다툼이 힘들더라고요. 특히 정성훈(전북) 선배가 상대하기 힘들었어요. 프로데뷔전에서는 같이 볼 다툼을 벌이다 코피가 터지기도 했죠.”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려대에 진학한 이재성은 2년 동안의 대학생활이 많이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중도에 대학을 그만두고 2008년, 당시 차범근 감독이 지휘하는 수원에 드래프트 1순위로 선발된다.
“대학에서 마음을 못 잡고 있는데 3개 구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어요. 2순위로 뽑아준다는 말에 덜컥 드래프트 신청을 했죠. 당일 현장에는 못 갔어요. 혹시 안 되면 창피하니까. 그때 현장에 있던 권순형(강원) 선배한테 전화가 왔는데 제가 수원에 1순위로 뽑혔대요. 솔직히 처음에는 안 믿었죠. 수원에서, 그것도 1순위로?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까 정말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러다가 이틀 정도 지나니까 엄청 부담이 됐어요. 그 전에 수원 1순위로 뽑힌 형들이 다들 잘했잖아요. (하)태균이 형은 신인왕, (박)현범이 형도 잘했고요. 문득 1순위 전통이 나 때문에 깨지겠구나 하는 부담감이 심했죠. 그렇게 수원에 들어가서는 차범근 감독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신인인데 경기도 많이 뛰게 해주시고 FA컵이랑 AFC챔피언스리그도 거의 다 나갔죠. 팬들한테 사랑도 많이 받았고요. 지금도 수원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착이 있어요. 원래 첫 팀이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잖아요.”
◇ 갑작스런 트레이드와 방황, 그리고 울산 이재성
수원에서 1년을 마친 이재성은 2010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울산 소속이던 염기훈과 트레이드 된다. 곽희주(수원)처럼 한 팀에서 오래 머무는 선수를 동경했던 그에게 갑작스런 이적은 충격이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기훈이 형을 내주는 조건으로 수원 선수 한 명을 요청했어요. 수원에서는 거절했지만 울산이 완강하게 나오니까 어쩔 수 없었죠. 원래는 다른 선수를 보내기로 했는데 울산에서 저를 지목했대요. 차범근 감독님이 저는 안 된다고 반대하셨는데 방법이 없었죠. 나중에 꼭 다시 데려오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울산에 처음 왔는데 적응을 못했어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힘들었죠. 혼자 방에 있고 얘기도 하기 싫고 피하고 싶었어요. 고민 끝에 김현석 코치님한테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거기서 버리거나 내치셨으면 끝났을 텐데 김호곤 감독님이 붙잡아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이제는 울산에 적응하니까 경기도 잘되는 거 같아요. 이런 사연때문인지 수원하고 경기를 하면 더 열심히 뛰게 돼요. 내가 이 만큼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 같은거죠.”
◇ 감독 조광래, 대표팀의 추억
A매치 데뷔전 이후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과 폴란드와의 평가전에도 이재성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폴란드전에서는 오른쪽 풀백으로 위치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연이은 부진을 보이자 주위에서는 이재성의 발탁을 두고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조광래 전 감독은 우려 섞인 주변의 시선에 대해 “이재성은 지금 당장은 주전으로 활용할 수 없어도 앞으로 한국축구 중앙수비수로는 상당히 기대되는 선수라고 생각한다”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자신을 믿어준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문제에 대해 이재성은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조광래 감독님은 부족한 게 많은데 저를 과분하게 좋아해 주셨어요. 워낙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발전 가능성과 미래를 보시잖아요. 대표팀에 얼마 안 있었지만 우리가 더 잘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감독님은 굉장히 열정적이시고 확고한 성격이셨어요. 그런 스타일에 맞춰 가고 있었는데 선수들이 많이 바뀌다 보니 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어요. 특히 레바논 원정 때는 경기장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고 경기가 안 풀렸어요. 어쨌든 감독님이 다 실수하신 건 아니라고 봐요. 한국축구가 좋아지는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중요한 경기가 남았는데 갑자기 이런 문제가 생기니까 섭섭한 생각이 들죠. 저 때문에 욕도 많이 들으셨는데 성격상 먼저 안부 인사를 드리기도 조심스럽고..."
본인이 느낀 대표팀 분위기와 차출 논란이 불거졌던 손흥민(함부르크)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젊은 층이 많으니까 편했고 처음 봤던 사람들끼리도 잘 어울렸어요. TV로만 보다가 실제로 대화한 건 처음이었죠. (이)승기(광주)랑 특히 친했어요. 둘 다 청소년 대표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표팀에 들어와서 그랬던 것 같아요. 흥민이도 한국에 오는 것 자체를 좋아했어요. 어린 나이에 해외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얼마나 대견스러워요. 한국에 오고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같이 운동하는 게 얼마나 좋겠어요. 흥민이 아버님 말씀은 그냥 순수하게 한 아버지의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부모 입장이라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 파란만장했던 준우승의 기억
2011 K리그에서 6위로 챔피언십에 오른 울산은 6강PO와 준PO,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상위 팀을 연달아 무너뜨렸다. 수비 위주의 팀이라는 편견을 깨고 날카로운 역습으로 ‘철퇴축구’라는 신조어도 탄생시켰다. 비록 결승에서 전북에 패하며 우승컵을 내줬지만 팬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저희가 정규리그 막판에 제주를 이기고 연승을 달렸어요. (곽)태휘 형이 6강 떨어지면 자존심이 허락 안한다는 말을 했어요. 김호곤 감독님도 6강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정말 재미있지 않겠냐면서 의욕을 북돋았고요. 그렇게 한 경기씩 이기다 보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상승세를 탄 것 같아요. 솔직히 챔피언십에서는 한 번 이길 줄 알았어요. 좀 더 욕심내서 ACL 티켓만 따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질 것 같은 경기인데도 계속 이기니까 신기하죠. 저희가 역습이 이렇게 빠른지 처음 알았어요(웃음). 4~5명씩 공격에 올라가는데 선수들이 뭔가 느낌이 있나봐요.”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올렸지만 이재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험이었다. 중요한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내주며 위기를 초래했고 마지막 경기에서는 경고 누적으로 출전기회 조차 얻지 못했다.
“솔직히 (김)승규(GK)는 저한테 고마워해야 돼요. 포항 전에서는 제가 영웅 만들어줬잖아요(웃음). 올해 PK를 세 번 허용했는데 챔피언십에서 두 번이나 내 준거예요. 포항 전 때는 제가 잘못했고 전북 전에서는 비가 와서 미끄러웠어요. 마지막 경기에서 경고 누적으로 못 뛰어서 너무 아쉬웠어요. 사람들한테는 실수한 기억으로 끝나잖아요. 꼭 만회하고 싶었는데 욕도 먹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주위에서 '이재성 의외로 잘한다' '플레이오프 재발견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자신감이 생겨서 흥분했던 것 같아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잘할 때일수록 집중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실수했는데도 선배들이 잘 했다고 격려 해주시고 감독님도 따로 불러서 동계 훈련 때 열심히 하자, 다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시는 데 정말 감사했어요.”
◇ 축구인생의 롤 모델
축구인과 소속팀을 통틀어 이재성이 가장 닮고 싶은 롤 모델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홍명보 감독님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경기장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부러웠어요. 김호곤 감독님도 저한테 카리스마를 키우라고 주문하시는 데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잘 안되네요. 울산에서는 태휘 형이랑 호흡이 잘 맞았어요. 처음엔 어려웠는데 대표 팀에도 같이 있으면서 친해졌죠. 조언도 많이 해주세요. 태휘형도 있지만 (설)기현이 형 역할이 컸어요. 물론 감독님이 계시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기현이 형이 믿음이 가요. 실제로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한 마디씩 해주는 게 진심이 담겨있어요. 같이 지내다 보니까 괜히 좋은 선수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두 형들이 중심을 잡아줘서 팀이 잘되는 것 같아요. 근데 울산의 진정한 살림꾼은 (이)호 형이에요.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하는데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실력만큼 인정을 못 받는 것 같아 아쉬워요.”
◇ 미래를 준비하는 미완의 기대주
이재성은 지금까지 자신의 활약에 대해 60점 정도라고 평가했다.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아직은 가다듬고 보완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는 본받을 점이 많고 자신한테 부끄럽지 않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며 자신을 낮췄지만 노후 준비, 은퇴 후 모습 등 많은 생각을 통해 자신을 맞춰가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너무 진지해 보인다는 말에 “저도 그게 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도 음악 좋아하고 여자 연예인한테 관심도 많아요. 옷을 사거나 헤어스타일에도 신경 쓰고 저 자신한테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죠. 발랄하게 보이고는 싶은데 솔직히 잘 안돼요. 주변에서 국가대표 되더니 변했다, 돈 좀 벌더니 변했다 하는 얘기가 들리니까 불편하기도 하고요.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고민을 털어 놓는 가까운 친구도 3-4명 정도 밖에 안돼요” 한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이재성은 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덧붙였다.
“제가 수원 때도 그랬지만 울산에 와서도 팬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경기 끝나고 버스로 이동할 때면 환호도 해주시고 관심을 보여 주시는 걸 피부로 느껴요. 근데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 아니라 특별한 반응 없이 피했던 것 같아요. 팬들을 관리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해요.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보여드려야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기량임에도 많은 감독들은 여전히 이재성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거란 믿음이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그런 부분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해나가는 과정이고요. 더 노력해야죠. 대표 팀에 다시 뽑혀 월드컵도 나가고 싶고 해외에도 가고 싶고... 안되더라도 K리그에 이름을 남기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 sport@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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