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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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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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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황 장군’은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는 길은 순식간이다. 단순한 후퇴가 아니다. 갑옷을 영원히 내려놓는다. 앞으로 전장의 뒤에서 후진 양성에만 매달린다.

넥센의 에이스였던 황두성이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자의로 내린 결정은 아니다. 11월 25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며 방출을 통보받았다. 발목을 잡은 건 주 무기였던 오른 어깨. 2년여 간 잦은 통증으로 마운드로의 복귀를 방해했다. 올 시즌 그는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넥센 구단은 더 이상의 인내를 발휘할 수 없었다. 재기의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황두성은 물 흐르듯 야구인생 2막을 맞게 됐다.


그는 대기만성의 표본이다. 황두성은 1997년 2차 3라운드(전체 20순위)로 삼성에 지명돼 프로에 데뷔했다. 당시 보직은 포수였다. 아마추어 시절 홍성흔(롯데)과 우위를 다툴 만큼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떨어진 시력으로 마스크를 내려놓았다. 포기는 아니었다. 강한 어깨 하나를 믿고 투수 전향을 시도했다. 그렇게 흘린 피땀이 열매를 맺기까진 8년이 소요됐다. 2005년 11승 9패 7홀드 평균자책점 3.29를 기록하며 현대의 주축선수로 거듭났다. 상승세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통산 243경기에서 남긴 성적은 36승 33패 16홀드 19세이브 평균자책점 3.94이다. 이 가운데 넥센과 전신인 현대 유니폼을 입고 거둔 성과는 9할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11년 동안의 인연은 전화 한 통화로 끝나버렸다. 황두성에게 방출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KIA에서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이번 통보에 대해 그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뼈아프다”라고 말한다. 삼성과 트레이닝 코치 계약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황두성이 여전히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쓸쓸한 퇴장의 길목에서 그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은 황두성과의 일문일답


스포츠투데이(이하 스투) 방출과 동시에 선수생활을 정리했다.


황두성(이하 황) 솔직히 더 뛰고 싶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스투 그런데 왜 은퇴 의사를 밝혔나.


방출 소식이 보류선수 명단 발표 일주일여 전에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타 구단의 영입 제안을 학수고대했지만 휴대폰은 조용했다. 모두 나를 더 이상 선수로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넥센 히어로즈 제공]


스투 함께 통보를 받은 박준수는 KIA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그래서 은퇴로 마음을 더 굳히게 됐다. 준수는 세 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반면 나를 찾는 구단은 없었다. 짧고도 긴 일주일 동안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욕심처럼 느껴졌다. 은퇴의 기로에서 나만 혼자 현실을 부정하고 정리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 같은 마음은 다르지 않다.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 마운드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절실하다.


스투 다시 마운드에 선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경기를 끝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쾌감을 맛보고 싶다. 팬들의 환호로 조성되는 1군 마운드 특유의 긴장감도 느껴보고 싶고. 2년 전만 해도 이를 스트레스라고 여겼다. 심리적 압박을 받으면서까지 공을 던져야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재활, 부진 등으로 경기를 뛰지 못하며 알게 됐다. 그것은 높은 성취감을 위한 작은 장애에 불과했다. 원래 모든 쾌감은 극한 상황을 넘어야만 찾아오는 법이다. 높은 긴장을 이겨내야 더 큰 행복도 맛볼 수 있다. 무료한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2년 동안 마운드를 그리워하며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스투 재활 이후 가장 공을 던지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면.


2009년 KIA와 SK의 한국시리즈 때다. TV를 통해 시청하는데 저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벌어진 가을야구 가운데 가장 재밌는 경기였다.


스투 경기를 꼼꼼하게 챙겨보는 편인가.


아니다. 처음 재활할 때만 해도 TV를 멀리했다. 경기가 눈에 들어오면 조급해질 것 같더라. 아무래도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이는 재활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속도를 붙이게 돼 좀처럼 부상을 털어낼 수 없게 만들었다.


스투 코칭스태프가 속도를 조절해줬을 텐데.


베테랑이다 보니 솔직히 믿고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돌이켜보면 재활은 조급함, 무료함과의 싸움인 것 같다. 충분히 몸을 만들고 느긋하게 생각해야 재기를 노릴 수 있다. 물론 선수 신분으로는 그 실천이 쉽지 않다. 유니폼을 벗으니 확실히 알겠더라. 나는 너무 조급했다. 남들보다 그저 출발이 조금 늦었다고 여겼다면 이렇게 방출되진 않았을 텐데.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을 지우지 못한 것이 다시 생각해도 너무 후회된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스투 1군 복귀를 위해 따로 노력을 많이 기울였을 것 같은데.


지난해 마무리훈련 명단에서 제외돼 자비를 들여 사이판 캠프를 다녀왔다. 구단과 상의 없이 나 혼자 결정한 일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궁금하다. 왜 많은 훈련에서 나를 자주 빠뜨렸는지. 내게 재기를 원했다면 최소한 발판은 마련해줬어야 했다.


스투 방출 통보를 앞당긴 건 어떤가. 넥센 구단은 새로운 구단을 수월하게 구하도록 돕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하는데.


(박)준수에게는 분명 도움이 됐을 것이다. 1군에서 34경기를 소화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내놓은 선수라는 이미지만 더 짙어지게 됐다.


스투 2001년부터 올해까지 넥센과 전신인 현대 유니폼을 입고 36승(33패)을 올렸다. 은퇴식도 없이 정리하는 선수생활이 아쉽지 않나.


은퇴식 등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코칭스태프 제의조차 없었던 건 조금 섭섭하다. 구단 실무진이나 김시진 감독 모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간 선수단이 힘들 때마다 후배들을 다독이며 적잖게 고생했는데 솔직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들을 더 챙길 수밖에 없는 구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 역시 욕심이 있는지라 최소한의 배려를 바랐던 것 같다.


스투 이장석 사장이나 김시진 감독을 따로 만난 적이 있나.


방출 발표 뒤 구단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이장석 사장이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들겨주며 그러더라. “삼성에서 코치로 영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코치할 생각이 있었느냐”라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은퇴 뒤 코치 제의를 마다할 선수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도 이해는 한다. 그간 연봉 값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니까. 김시진 감독은 어깨를 걱정해줬다. “몸 상태는 좀 나아졌니?”라고 물어 “공을 던져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스투 그때 다른 선수들과도 작별인사를 한 건가.


그렇다. 몇몇 선수와 코치들이 삼성에서 코치 제의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더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더니 모두 구단 실무진을 통해서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웃음). 몇몇 후배들은 ‘왜 넥센이 아닌 삼성에서 코치생활을 하느냐’라고 물었다. 제의조차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넥센에서 일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금 답답했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넥센 히어로즈 제공]


스투 삼성에서 코치 제안은 어떻게 받았나.


방출 소식을 전달받고 바로 (박)준수와 함께 밤낚시를 떠났다. 낚시찌를 바라보며 다른 구단의 전화를 기다렸는데 벨소리를 울려대는 건 준수의 휴대폰뿐이었다. NC, LG, KIA 등 4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더라. 낙심하던 찰나에 삼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선수로서의 영입 제안은 아니었다. 트레이닝 코치로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고갔다.


스투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이었나.


그렇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솔직히 편하게 다시 한 번 도전하고 싶다. 플레잉코치와 같은 형태로 말이다. 선수들을 지도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몸을 만들 계획이다. 어깨 통증만 씻는다면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스투 지난 2년 동안 재활에만 매달렸다. 끝내 마운드에 복귀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재활은 크게 피칭, 시츄레이션, 실전 투입 등 다섯 단계를 거친다. 나는 늘 실전 투입을 앞두고 통증이 재발했다. 어깨에 주사를 맞아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첫 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2년간 다섯 차례 반복됐다. 나름대로는 단계들을 꾸준히 밟았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분명 마지막 단계에서 미끄러졌을 거다.


스투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를 찾지 못한 건가.


그렇다. 생각해보면 타이밍이 이유인 것 같다. 어깨나 팔꿈치에 통증이 없는 선수는 없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고질병을 가지고 있다. 관건은 참고 던질 수 있는 수준의 통증인지 여부다. 2009년 (손)민한이 형의 투구는 이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당시 아픈 어깨로 꾸역꾸역 던지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직접 찾아가 물어봤다. “왜 통증을 참으면서까지 던지려고 해요? 계약에 큰 옵션이라도 걸려 있어요?”라고. 민한이 형은 “견딜 수 있는 통증은 버틸수록 괜찮아질 수 있다”라고 이야기해줬다. 나는 2년 동안 그 정도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 조금만 세게 던져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다. 신기한 건 그렇게 아프다가도 야구장만 빠져나오면 통증이 사라졌다. 마운드에서 자꾸만 움츠려들며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넥센 히어로즈 제공]


스투 재활은 주로 어디에서 소화했나.


2군 훈련지인 강진에서 머물다 서울 잠실 인근의 스포츠센터에서 몸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해 넥센 동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나마 절친한 동료인 (박)준수를 만난 것이 전부였다. 올해 스프링캠프까지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시범경기였다. 어깨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했다. 안타를 맞고 팬들로부터 한물갔단 평가를 듣기 싫어 조금 욕심을 냈는데 결국 3월 27일 SK전에서 탈이 나고 말았다. 꾸역꾸역 공을 던지며 ‘스톱’을 외칠까 고민하던 찰나에 정민태 코치가 눈치를 채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아프지?”라는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 던지자”라며 손에 쥔 공을 빼앗는 정민태 코치를 보며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스투 그간 재활에 전념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자신이 그저 초라하게 느껴졌다.


스투 이후 강진으로 다시 내려가게 됐다. 그 곳에서의 훈련은 어떠했나.


강진은 운동만 할 수 있는 곳이다. 휴식도 거의 주어지지 않고. 열악한 환경에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운동을 잘하려면 어느 정도의 여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친구들도 만나고 스트레스를 풀어야 동기부여도 생기는 법이다. 넥센 구단은 솔직히 2군을 너무 방치한다. 2년 동안 2군에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스투 2군 선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 같다.


미친 듯이 운동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도 드물고. 문제는 잘못된 방법의 습관화에 있다. 나중에 교정을 더 어렵게 만들어 자칫 선수생활까지 망치게 만든다. 그래서 선수들은 생각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전환점을 스스로 마련할 줄 알아야만 한 단계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스투 자신에게 맞는 훈련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야구에는 정답이 없다. 타고난 체격, 재능이 모두 다른 까닭이다. 교과서대로의 연습은 결코 성공과 직결될 수 없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프로에서 많은 돈을 받는 선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실패를 반복하며 자신에게 맞는 동작을 만들었다. 유망주라고 불리는 선수들이 이 점을 꼭 기억해뒀으면 좋겠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스투 재활훈련을 함께 했던 김수경은 9월 28일 문학 SK전에서 745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고생 끝에 드디어 빛을 본 것 같다. 사실 수경은 재활이 아니었다. 통증을 느꼈지만 참고 던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2군 경기에 꾸준히 등판한 건 이 때문이다. 성격이 무척 좋은 친구라 서로 의지가 많이 됐는데 내년 이전 모습을 꼭 재현했으면 좋겠다.


스투 넥센 구단은 최근 당신을 포함해 총 12명을 방출했다.


젊은 선수들이 쫓겨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 한 번은 기회를 줬으면 한다. 물론 구단의 방침도 이해는 한다. 이곳은 프로이니까. 하지만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쫓아내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투 생애 두 번째 방출이다. 2000년 해태(KIA 전신)에서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사실 그땐 다시 일어설 자신이 있었다. 남들보다 체격 조건이 좋은 편이라 ‘다른 구단에서 뛰면 되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방출은 다르다. 어느덧 35살이다. 더구나 방출당할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스투 그것이 무엇인지 공개해줄 수 있나.


9월 5일 무릎 연골이 찢어져 수술을 받았다. 어깨도 아픈데 무릎까지 온전하지 못하다보니 내 몸이 이젠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를 그만두라는 일종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스투 가족들의 걱정이 컸을 것 같다.


“내년에는 TV에서 볼 수 있는 거지?”라고 묻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미안했다. 재기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는데 방출이란 결과를 안겨 드려 실망이 크실 것 같다. 작은 아버지도 빼놓을 수 없다. 매 경기를 응원해주셨는데 마운드에 복귀하는 모습을 보시지 못한 채 며칠 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용기를 주신 분들이 주위에 많았다. 그래서 떠나는 마음이 천근만근인 것 같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현대 유니콘스 제공]


스투 방출 통보는 어떻게 전달받았나.


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휴대폰을 통해 소식을 전달받았다. 가족들이 함께 있어 얼굴 표정을 관리하는데 애를 좀 먹었다.


스투 전화 한 통으로 끝난 구단과의 11년 인연이 무척 속상했을 것 같다.


얼마 전 조조할인으로 ‘머니볼’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씁쓸한 기분이 들더라. 극장에 나를 포함해 다섯 명밖에 없었던 탓이 아니었다. 선수를 상품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시각 자체가 안타까웠다. 방출을 당한 뒤 보게 된 영화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구단은 충분히 선수를 상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수도 사람이다. 전화 한 통화로 한 선수의 야구인생을 끝내는 건 다소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넥센 구단에 아직도 많이 섭섭하다. 방출이란 결과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실무진이 직접 찾아와 “그동안 수고했다”라는 말 정도는 꼭 듣고 싶었다.


스투 현재 몸 상태는 어떠한가.


홀로 열심히 재활을 하고 있다. 오른 어깨와 무릎 모두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선수로 복귀할 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언제 통증이 재발할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


스투 삼성에서 코치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방출 통보 뒤 2, 3일 동안은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찾는 구단이 없고 2년 동안 마운드를 멀리했다고 생각하니 어린 친구들을 가르치는 편이 나을 듯싶더라. 어차피 선수생활을 마감하면 코치에 도전하려고 했다. 나름 잘 풀렸다고 본다.


스투 당신에 대해 과소평가된 선수라는 의견이 적지 않은데.


스타는 아니었다. 통산 성적이 이를 말해준다(웃음). 그냥 열심히 뛰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신조는 있었다. 나보다 늘 팀을 먼저 생각했다. 어떤 자리든 마다하지 않고 맡은 건 이 때문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뒤) 생각해보면 2008년 갑작스럽게 마무리를 맡은 것이 오른 어깨 부상으로 연결된 것 같다. 선발을 고집했다면 내 인생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스투 당시 이광환 감독은 당신이 마무리를 자진했다고 말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코칭스태프가 그렇게 분위기를 몰고 갔다. 선발로 다승과 평균자책점 선두를 달렸을 때 두산전에서 최준석에게 홈런 두 방을 맞아 역전패를 당한 적이 있다. 경기 뒤 이광환 감독이 나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마무리가 없어 큰일이다”라고. 그것이 무엇을 뜻했겠는가. 마무리를 맡은 건 솔직히 반강제나 다름없었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넥센 히어로즈 제공]


스투 그해 8세이브를 올리던 와중 다카쓰 신고의 가세로 다시 보직이 바뀌었다.


‘나는 구단에서 어떤 존재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무리로만 시즌을 마쳤다면 어깨에 탈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스투 다카쓰가 무척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


(고개를 내저으며)전혀.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만남을 위해 직접 일본을 찾아간 적도 있다. 다카쓰의 야구 열정을 높게 평가한다. 올해 43살인데도 사회인야구인 BC리그 니가타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뛴다. 프로야구 해설도 함께 병행하고. 그는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함께 뛸 때 담배를 태우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파하면서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마운드에 올랐다. 걱정된 마음에 경기 뒤 “괜찮아?”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프지만 야구를 하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다. 나 스스로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카쓰는 그 두 단계 위인 것 같다.


스투 14년 동안 프로에서 뛰며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안영태 넥센 트레이너와 (박)준수다. 안 트레이너에겐 많이 미안하다. 재활이 신통치 않을 때마다 짜증을 내 스트레스를 많이 안겨줬다. 온갖 투정을 아무렇지 않게 다 받아준 그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준수는 넥센에서 유일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후배였다. 남에게 잘 기대지 않는 편인데 두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스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97년 성균관대를 돌연 중퇴하고 삼성에 입단했다.


대학생활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진학과 동시에 주전포수를 맡았는데 큰 고민 없이 바로 자퇴서를 제출했다. 밀약 등이 있던 건 아니었다. 배명고 시절 운동을 하며 사춘기를 겪지 못했는데 뒤늦게 방황의 시간을 맞았던 것 같다. 삼성 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1년 동안 연습생으로 뛰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는데 한 달에 100만 원씩을 지원받았다. 구단의 배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3개월 이상을 일본 프로야구 긴데스 버팔로스(현 오릭스)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박정환 배터리코치와 함께. 연습생치고는 무척 파격적인 대우였다.


스투 원래 입단하고 싶은 구단이 따로 있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알았나. 사실 선호했던 구단은 OB(두산)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배명고 시절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던 (김)동주 선배가 뛰고 있어서(웃음).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스투 포수 마스크를 돌연 내려놓은 까닭은 무엇인가.


시력이 좋지 않은데다 난시까지 있어 캐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야간경기만 나서면 투수의 사인이 보이지 않았다. 펴진 손가락이 두 개인지 세 개인지 알 수 없어 공을 놓친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는 렌즈가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해결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수술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스투 투수로 전향하며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성공을 목표로 하진 않았다. 각 구장 마운드를 모두 서보고 은퇴하는 게 꿈이었다. 그땐 비전 없는 2군 선수였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시 목표를 모두 이뤄냈다. 모든 구장에서 승리를 챙겼고 2005년에는 11승(9패)도 올렸다. 국가대표 유니폼도 입어봤으니 투수 전향은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스투 전향 당시에도 이 같은 성과를 기대했나.


(웃으며)아주 조금. 솔직히 포수로 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구 인생 통틀어 삼성에서 가장 열심히 훈련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 터득 없이 코치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로봇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들 무렵 장호연 코치가 투수 전향을 처음 제안했다. 이유는 단 하나, 강한 어깨였다.


스투 지금은 그 어깨의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게 됐다.


그래서 조금 억울하다. 35년을 살아오며 누구보다 강한 어깨를 갖췄다고 자부했다. 나를 가르쳤던 배명고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였다. 모두 어깨 하나만큼은 김동주 선배보다 낫다고 했다. 유상호 당시 성균관대 감독도 “2학년 때부터 투수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라고 권유했고. 당시 싱싱했던 어깨를 꼭 다시 되찾고 싶다.


스투 올해 넥센의 장영석이 당신처럼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타격에 소질이 있는 친구다. 조금만 노력하면 자리를 잡을 것 같은데 굳이 왜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향을 택했다. 영석이는 다르다. 타자로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다. 왜 뻔히 보이는 지름길을 돌아서 가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장영석


스투 장영석에게 먼저 전향을 한 선배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이왕 선택한 길이라면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마운드는 심적인 부담이 심한 자리다. 부천고에서 경험이 있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기적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거라고. 투수는 그런 친구들이 잘하는 것 같다. 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늘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포수 출신이라 그걸 고치는데 적잖게 애를 먹었다. 포수를 흔히 선수단의 엄마라고 한다. 다독여주고 감싸안아줘야 하는 위치에서 정반대로 바뀌려고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스투 마운드에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웠던 타자는 누구였나.


이범호(KIA), 고영민(두산), 정근우(SK) 등에게 약했는데 한 명을 꼽는다면 이범호다. 이유는 모르겠다. 상대할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투 프로 입문 전 롤 모델이 있었나.


(고개를 내저으며)전혀. 어렸을 때는 프로야구 경기도 거의 보지 않았다. 그저 맞는 색깔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솔직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견제, 수비능력, 컨트롤, 변화구 구사 등 어느 하나 합격점을 주고 싶지 않다. 믿을 건 직구 하나였다. 그 공에 방망이를 헛도는 타자들을 보며 야구에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스투 야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서울 길동초교 3학년 때다.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순전히 오기로 파고들었다. 형들이 던져주는 변화구에 방망이를 헛돌릴 때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때부터 타격훈련에 사활을 걸게 됐다. 사실 부모님은 운동선수가 되는 걸 반대했다. 어렸을 때 공부를 꽤 잘했기 때문이다(웃음). 초등학교 6년 가운데 4년 동안 반장을 역임했다. 나머지 2년은 일란성 쌍둥이 형이 맡았고.


스투 해태로 둥지를 옮긴 뒤 나선 삼성전에서 빈볼을 던져 벤치클리어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김응룡 해태 감독이 경기 뒤 “쟤 컨트롤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시비야?”라고 말했는데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나.


맞추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상대했던 타자가 김태균 선배였는데 몸 쪽으로 던진 공이 엉뚱하게 얼굴로 향하고 말았다. 솔직히 태균 선배가 피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공을 무서워하지 않더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당시 나는 김응룡 감독의 집에서 (곽)현희 선배, (강)영식이, (유)동훈이와 함께 살았다. 특별 관리대상자들이라고 할까(웃음). 경기 뒤 김응룡 감독이 엘리베이터에서 물었다. “일부러 맞춘 거냐?”라고. 손사래를 쳤더니 김응룡 감독은 “투수라면 그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 한다”며 칭찬을 해줬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실력이 형편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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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김응룡 감독과 함께 지내며 어려운 점은 없었나.


(고개를 내저으며)전혀. 아침마다 토스트를 해주셨는데 아직도 재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갓 익은 식빵 사이에 항상 두꺼운 햄과 계란 프라이를 넣어주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먹었던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춘 뒤)곤욕스러운 점도 있었다. 아침마다 조리과정이 더해지지 않은 양파를 사과처럼 먹어야 했다. 그걸 먹고 나면 하루 종일 입에서 양파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토스트는 먹을 만했지만 양파는 정말 최악이었다. 오래 있진 않았지만 해태에서 재밌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특히 2000년 중국 광저우에서의 스프링캠프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선수촌 같이 생긴 숙소에서 지냈는데 2달여 동안 체중이 10kg 이상 줄어들었다.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국자로 국을 뜨면 자라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국물의 향도 코를 찌를 듯 강했고. 쌀쌀한 저녁 날씨 탓에 귀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 (곽)채진 선배도 같은 증상으로 함께 고생했다.


스투 2년을 채 뛰진 못했지만 해태에 대한 기억이 남다른 것 같다.


솔직히 후회스럽다. 투구를 조금 더 일찍 깨우쳤다면 좋았을 텐데. 당시 나는 보직만 투수였다. 기본기가 한참 부족했다. 누군가가 가르쳐주길 바랐지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상윤 코치가 있었지만 한 번도 틀을 잡아주지 않았다. 선수들 스스로 알아서 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무엇이든 혼자 배워나가야 했다.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적응을 하지 못한 내 책임이 컸다.


스투 방출 뒤 현대에서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다.


유영수 당시 2군 감독이 신경을 많이 써준 덕이다. 선발로 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주셨다. 정명원 코치(현 두산)의 비법 전수도 빼놓을 수 없다. 타자와 싸우는 법은 모두 정명원 코치에게서 배웠다.


스투 야구인생에서 전성기가 언제였다고 생각하나.


없었던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춘 뒤)굳이 꼽는다면 2005년이다. 선수로서 처음 빛을 본 시즌이었다. 첫 승은 물론 60경기에 출전해 11승을 챙겼다.


스투 그렇다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2005년 4월 24일 잠실 LG전이다. 생애 프로 첫 승을 거뒀는데 무척 극적이었다. 조용준이 7-5로 앞선 9회 2점을 허용해 연장전에 돌입했는데 10회 1아웃 만루 위기에서 김재박 감독이 벤치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사실 나는 전날 5이닝 이상을 던져 게임을 뛰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잠시 몸을 풀던 모습을 김재박 감독이 본 듯했다. 대뜸 “나갈 수 있겠냐?”라고 묻는데 겁도 없이 “네”라고 말했다. 그렇게 오른 마운드에서 정의윤과 박용택을 각각 삼진, 1루수 앞 땅볼로 처리했다. 그리고 다음 공격에서 (이)숭용이 형이 신윤호로부터 솔로 홈런을 때려 8-7 승리를 거뒀다. 경기 뒤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숭용이 형이 다가와 어깨를 두들겨줬는데 “축하한다”라며 활짝 웃던 미소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황두성 [사진 = 넥센 히어로즈 제공]


스투 투수로 전향하고 생애 첫 승을 거두기까지 7년이 걸렸다. 이후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생각의 변화 덕인 것 같다. 첫 승이 충분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운드가 다르게 보이더라. 공을 던질 때마다 신도 났고. 사실 기회를 얻은 건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운이 많이 따랐다. 당시 프로야구에 불어 닥친 병역비리 파동으로 마운드에 오를 찬스를 많이 얻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내 자신에게서 가끔 뿌듯함을 느낀다.


스투 처음부터 포수가 아닌 투수를 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더 좋을 수 있었겠지만 팔, 어깨 등에서 이상이 더 일찍 발견되지 않았을까.


스투 반대로 포수를 끝까지 고수했다면 어떠했을까.


결론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야구를 일찍 그만뒀거나 장수하는 선수로 끝까지 살아남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여전히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홍)성흔(롯데)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더 쏠린다. 아마추어 시절 그와 라이벌이었다. 성흔이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기량차가 거의 나질 않았다. 포수 자리를 계속 지켰다면 아주 못하진 않았을 것 같다.


스투 앞으로 삼성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어떤 점에 주안을 둘 계획인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기준은 있다. 선수 육성보다는 다양한 측면으로 도움을 주는데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선수들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발목 잡힌 장애를 보다 수월하게 뿌리칠 수 있도록 다양한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다. 최근 심리학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있다. 앞으로 공부할 게 산더미다.


스투 넥센에서도 이 같은 교육을 전달한 적이 있을 것 같은데.


후배들에게 조언을 자주 건네는 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절실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다.


[피플+]황두성 "장례식장에서 받은 방출 통보 서러웠다"(인터뷰)


스투 대성할만한 자질을 갖춘 선수를 한 명만 꼽아 달라.


김대우다. 투수로서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타자와 싸우는 방법만 익힌다면 분명 큰 선수로 성장할 것이다. 아직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올 시즌 반짝 빛났는데 그친 건 이 때문이다. 제풀에 지쳐 막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스타로 거듭날 만한 가능성만큼은 충분한 후배다. 아직 정대현과 같은 제구력은 발견되지 않지만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든다면 분명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선보일 것이다.


스투 넥센은 전신인 현대를 포함해 당신이 11년간 몸담았던 곳이다. 2012시즌 어떤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하나.


점점 나아지겠지만 당장의 상승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스타급 선수들이 너무 많이 이탈했다. 팀의 중심이 되어야 할 30대 초반 선수가 유한준, 이택근 등에 그치는 것도 문제다. 이들이 고참과 젊은 후배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다섯 명도 되지 않아 원활한 의사소통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 하나로 똘똘 뭉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셈이다. 후배들에게 이는 상당한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른 나이에 많은 출전 기회를 제공받아 당장은 행복하겠지만 이들은 명심해야 한다. 야구는 결코 혼자 잘해서 성공할 수 없는 스포츠다.


스투 넥센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런 팀을 떠나게 돼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다. 선수를 은퇴하면 함께했던 후배들에게 꼭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 후배들이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 충분히 플러스 요인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무진이나 김시진 감독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이 같은 현실을 원망하진 않는다. 충분히 이해한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이제는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할 때다. 다시 돌아가게 된 삼성에서 꼭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높이겠다. (잠시 말을 멈춘 뒤)얼마 되지 않는 팬들과 마운드에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꼭 증명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방출로 은퇴하게 돼 너무 미안하다. 팬들의 성원 덕에 지난 11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응원을 항상 기억하며 살겠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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