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LOGO#> 긴장은 유난히 다른 배우들에 비해 많은 무대에 대한 경외심 때문인 것 같다.
류정한: 무대를 자기 집처럼 대하고 편하게 공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지금도 부럽다. 내가 그런 걸 잘 못하니까 그런 배우들하고 공연할 때는 따라도 해본다. 근데 안 된다. 그래도 지금은 좀 많이 풀어졌는데, 여전히 공연 시작 4시간 전에는 공연장에 가 있어야 되고 그런다. 성격인 것 같다. 난 뮤지컬배우가 굉장히 멋진 일이고 또 그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상식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토니 어워즈나 영국의 올리비에 어워즈는 뮤지컬에만 국한된 시상식이 아니다. 우리도 엔터테인먼트 전반을 다루는 시상식에서 권위 있는 결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뮤지컬 시상식이라면 차라리 상 주지 말고 진짜 제대로 축하무대 잘 찍어서 프라임타임에 한번 내보냈으면 좋겠고. 뮤지컬배우들도 영화배우, 탤런트 못지않게 가진 게 많다.
“배우는 무조건 공연에 올인 해야 된다”
<#10LOGO#> 무대에 대한, 이 판 전체에 대한 그런 마음가짐 덕분인지 여전히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실력과 위치임에도 <엘리자벳>을 계기로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류정한: 내가 마흔이 넘었는데, 우리 위에 있는 선배들도, 나도, 내 또래 다른 배우들도 그 나이에 분명히 해줘야 할 것들을 많이 못 하고 있다. 주, 조연을 떠나서 이 시장에 계속 남아 있어야 후배들도 그 사람을 보고 꿈을 갖게 된다. 사실 배우를 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쉽게 못 놓는다. 하지만 선배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후배가 더 빛날 수 있고, 멋지게 했던 배우들이 엄마, 아빠 역 하면서 무게를 잡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 나이에 맞는 역들이 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혹은 어린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도 있고, 주인공은 아니지만 중년 배우들이 굉장히 서포트를 잘해줘야 하는 작품도 있다. 배우 인권을 위해 뒤에서 노력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우는 무대에서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어린 배우들도 그게 당연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10LOGO#>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리지 않나.
류정한: 나도 주인공 떠나야 될 나이가 거의 다 됐다. ‘할 수 있겠냐’ 라고 스스로 질문해봤는데 역시 쉽지 않다. 커튼콜 때 내가 제일 마지막에 나왔는데, 이제는 먼저 나와서 인사하고 박수쳐줘야 되고. 이걸 내가 해야 돼? (웃음) 인간적으로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지인들도 공연 안 하면 안 했지 절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런 얘기 들으면 ‘그래, 못하겠지’ 이런다. (웃음) 근데 누가 그러더라. 한번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하고 나면 되게 편하다고. 누구는 옛날에 주인공 안 했나? 다 했지. 김장섭 씨 옛날에 팬텀이었는데 지금은 다 한다. 근데 그 형님이 되게 편해 보인다. 배역에 대해 편해지니까 공연 자체를 즐기면서 하는 거다. 나도 오랫동안 남아서 후배들 다독거리면서 공연이 산으로 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10LOGO#>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류정한: <오페라의 유령>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원캐스트로 260회 이상을 공연했었는데, 발목을 심하게 다쳐서 후반부에는 얼터(어떤 역에 교대 출연시키기로 미리 정해놓고 훈련하는 배우로, 해당 배우가 사정상 출연하지 못했을 때 무대에 선다)가 공연을 하게 됐다. 근데 막공 낮 공연까지 얼터가 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다. (웃음) 그래서 아는 의사한테 부탁해서 몰핀을 맞고 무대에 섰다. 그때는 공연 시작 전 캐스팅을 불러줬는데 “라울에 류정한” 하니까 객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고 순간 눈물이 나오더라. 난 주인공도 아닌데. 그 상태로 공연하고 커튼콜을 나갔는데 LG아트센터 정 가운데 120석이 오렌지색으로 가득한 거다. 건승정한 색이 오렌지인데 (웃음) 혹시라도 객석을 봤을 때 힘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3개월 전에 티켓을 구입해 티를 맞춰 입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때 이후로 그 친구들에게 책임감도 느끼고, 공연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나한테 정말 좋은 영향을 많이 줬다.
<#10LOGO#> 팬은 진짜 배우를 따라가나 보다. (웃음) 말보다는 행동으로,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시선을 가진 류정한의 길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2004년부터 했던 <지킬앤하이드>도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류정한: 나이 오십 넘어서 정말 5회 정도 스페셜하게 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그 나이대 배우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니까 옛날 생각하면서 할 수도 있겠지. 그건 온전하게 그 작품을 응원하겠다는 의미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외국에서는 4, 50대 배우들도 얼마든지 지킬을 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게 뮤지컬은 결국 재공연을 계속할 수 있는 게 좋은 공연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다른 캐스팅을 보고 싶어 하고, 기존에 했던 배우들과 비교도 하고, 어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지 기대도 한다. 그런 게 공연이고, <지킬앤하이드>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 더 좋은 배우들이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객석에서 보면 재밌잖아. 지킬,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하하하하
<#10LOGO#> ‘이 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되는 일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류정한: 처음엔 배우가 아니라 카메론 매킨토시(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의 프로듀서)처럼 되고 싶어서 뮤지컬을 시작했던 거다. 그래서 유학도 경영 쪽으로 갔었다. 앞으로는 배우를 하면서도 부추길 것들은 부추기고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하며 뮤지컬 전반에 참여하고 싶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만큼 뜨거운 뮤지컬 관객들이 있는 곳이 없다. 그래서 희망은 있다. 환경이 만들어지고 정화가 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했던 멋진 일들이 펼쳐질 거다. 20년 딱 됐는데 똑같구나, 역시 안 되는구나, 생각되면 되게 슬플 것 같아. 예전보다 환경이 많이 좋아졌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가 문제다. 그래서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해도 안 돼’라 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된다. 그리고 클래식이 됐건 오페라가 됐건 한 번 정도는 제작하고 싶고.
<#10LOGO#> 뮤지컬 프로듀서는?
류정한: 그건 너무 힘들어서 안 할 거다. 멋진 것만 생각하다 프로듀서들 만나보니 내 성격에 진짜 큰일 나겠다 싶더라. 프로듀서는 크리에이티브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환경이 안 돼서 돈부터 생각해야 하니 창작 대신 라이선스 작품을 계속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굳건하게 프로듀서 한다는 거 진짜 대단한 거다. 난 프로듀서들이 전세기 타고 다니면 좋겠다. 전세기를 타는 거 자체가 멋진 게 아니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보상받는 것 자체가 부러운 일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판을 짜고, 좋은 창작을 만들어서 외국에 팔고. 그리고 관객은 우리가 연예인처럼 TV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비싼 돈 내고 공연을 관람하는 분들인 만큼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더 좋은 걸 보여줘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뮤지컬이 진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 거품도 많이 사그라질 거고, 정말 뮤지컬 해야 되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양질의 공연을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팬들은 굉장히 중요하고, 그들 역시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10LOGO#> 결국은 배우, 제작자, 관객까지 모두가 같이 이뤄나가야 되는 일인데, 그럼 배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류정한: 첫 번째는 무조건 공연에 올인 해서 열심히 해야 된다. 배우가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게 자기 공연인데, 주변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공연이 산으로 간다. 두 번째는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되는 거고, 세 번째는 자기관리. 그리고 네 번째는 관객에게 좋은 얘기를 공연으로 해야 된다. 다 공연에 대한 거지 뭐.
“요즘은 가정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다”
<#10LOGO#> 전동석처럼 제 2의 류정한을 꿈꾸는 후배들이 많아졌고, 소위 일가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단계별로 고민하기 마련인데 요즘의 고민은 뭔가.
류정한: 결혼. 하하하하하하하. 어떨 때 보면 내가 너무 한심하다. 결혼한 주변 사람들은 나한테 죽어도 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들은 다 했으면서. (웃음) 근데 그들이 욕하고 싫어하는 게 난 지금 부럽다.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특별히 없는데,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부럽고 위대해 보인다. 정말로 진심으로. 진짜 나를 인정하고 내 편인 가정이 생긴다면 배역이나 작품에 대해 편해질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의식하는 게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게 없어지면 연기적 스펙트럼도 넓어질 것 같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바보같이 용기도 더 없어지고, (웃음) 하려고 하니까 더 힘들어진다. 과연 할 수 있을까.
<#10LOGO#> 확실히 류정한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결혼이나 부인이 제일 먼저 나온다. (웃음)
류정한: 그거 왜 나오는 거지? 예전에 그걸 검색하고 온 사람과 만난 적이 있는데 결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묻더라. (웃음)
<#10LOGO#> 오랜 시간이 흘러서 대한민국뮤지컬사 같은 책이 나온다면, 류정한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류정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꿈은 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팬들 만나고 관객 만나는 거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0대에는 건축과 요리, 내가 좋아하는 거 배우면서 학생이었으면 좋겠고, 60대에는 그걸 실현해보고 싶다. 공연도 계속 보러 다니고. 그러려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 그 나이에도 공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냥 뮤지컬배우 류정한으로 평가받고 싶다. 배우 류정한도 아니고 뮤지컬배우 류정한. 그게 내 타이틀이고, 공연을 안 하게 됐을 때 자식이 “아빠 예전에 뭐 했어?” 그러면 “뮤지컬배우”라고 얘기할 거다. 그래서 자료는 몇 개 모아놨다. 안 믿을까 봐.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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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장경진 three@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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