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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詩]마종기 '축제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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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꽃 속에 들어가면/ 따뜻하다./ 수술과 암술이/ 바람이나 손길을 핑계 삼아/ 은근히 몸을 기대며/ 살고 있는 곳.// 시들어 고개 숙인 꽃까지/ 따뜻하다./ 임신한 몸이든 아니든/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깊이 잠들어버린 꽃.//내가 그대에게 가는 여정도/ 따뜻하리라./ 잠든 꽃의 눈과 귀는/ 이루지 못한 꿈에 싸이고/ 이별이여, 축제의 표적이여./ 애절한 꽃가루가 만발하게 / 우리를 온통 적셔주리라.


마종기 '축제의 꽃'

[아, 저詩]마종기 '축제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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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하다는 말의 의미값을 이만큼까지 따뜻하게 써보지 못한 거 같아 분하다. 꽃 속의 따뜻함. 빛깔과 정적이 주는 아늑함. 수술과 암술이 은근히 몸을 기대고 있다는 관찰은 꽃잎 속에 더없이 평화로운 신방을 차린다. 하지만 마종기는 그 평화를 예찬하러온 사람은 아니다. 문제는 시든 꽃이다. 시든 꽃 속도 여전히 따뜻하다는 저 통찰이 마음을 떨게 한다. 사랑이 끝나고 슬픔마저 잠들어버렸다 하더라도, 거기 여전히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부드럽게 누워있는 사랑이 있다. 이별이란 이런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의 반댓말이 아니다. 이별은 만남이 지니고 있던 따뜻함이 여전히 내부에서 가만히 잠들어, 오히려 기억 속에서 작은 축제가 되는 그런 꽃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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