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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패션인생 37년]魂을 파는 패션그룹 세정의 ‘인디안神話’ 드라마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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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호 회장의 ‘도전과 열정경영 37년’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패션인생 37년]魂을 파는 패션그룹 세정의 ‘인디안神話’ 드라마는 계속된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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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호 회장은 누구
■ 1946년 7월 7일 출생
■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 부산외국어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 (현)㈜세정그룹 대표이사 회장
■ (현)주한멕시코 명예영사
■ (현)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
■ (현)부산메세나진흥원 이사장
■(현)한국패션협회 이사

1968년 부산시 부산중앙시장에 작은 의류 가게가 하나 생겼다. 메리야스(내의)를 도매로 팔았는데 장사가 참 잘 됐다. 5년 후, 주인은 인근 부산진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직접 옷을 만들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부쳤다.


당시 국내에선 주력산업으로 섬유·의류 제조업의 위상이 높았을 때. 상품 제조회사를 뜻하는 ‘메이커’(현재의 ‘브랜드’)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기성복이란 개념이 태동할 때다.

이후 40여 년.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를 경험했고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하는 사태를 겪었다. 글로벌 시대가 도래했고 첨단기술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놨다. 패션 업계의 판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해외 브랜드들이 한국 시장에 대거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산 기성복의 설 자리가 줄었다. 1~2주일 단위로 신상품을 쏟아내는 외국 패스트패션 업체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무한 경쟁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그럼 아까 그 의류 가게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것도 정상급 패션 기업으로. 물론 부침이 없진 않았다. 제조업에 눈을 돌린 1970년대 이후 몇 번의 고비를 겪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 삼아 더 큰 성장을 이뤘다는 평가를 듣는다.


토털 남성복 브랜드 ‘인디안’으로 유명한 세정그룹 얘기다. 치열해지는 시장 환경에서 지난해 당당히 연매출 1조원을 달성했다. 이랜드, 제일모직, LG패션, 코오롱패션 등 ‘빅4’ 외에 최대 매출을 자랑한다.


수입 브랜드의 거센 물결에도 토종 브랜드의 자존심을 지키며 인디안을 필두로 ‘올리비아로렌’ ‘앤섬’ ‘NII’ ‘크리스.크리스티’ ‘센터폴’ 등 10여개의 국산 브랜드를 키워냈다. 주인공은 박순호(65) 회장이다.


아까 그 가게의 주인장이기도 한 그는 놀랍게도 맨손으로 회사를 일궜다. 든든한 집안이나 화려한 배경 없이 성공 신화를 썼다. 무일푼에서 1조원 가치의 기업을 만들어낸 비결은 뭘까.


나라 안팎 모두 먹구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 위기 시대다. 이럴 때 간절한 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밝혀 줄 희망이요, 등불이다. 용기와 길잡이가 돼 줄 ‘경영인 박순호’ ‘인간 박순호’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인디안’ ‘홍길동’ ‘인디애나 존스’ 그리고 ‘더미’.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얼핏 보면 아무 상관이 없는 단어들의 나열인가 싶겠지만, 이들에겐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박순호 회장이다. 모두 청년 박순호를 반하게 한 옷과의 인연에서 출발한다.


인디안이란 이름으로 일명 ‘폴라티’라고 불리는 터틀넥 티셔츠를 만든 이 남자, 드넓은 황야를 달리는 인디안 추장처럼 패션 시장에 거침없이 도전해 왔다. 고객과 직원이 있는 현장이라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디든 나타나 생기 있게 누비고 다니니 홍길동이 따로 없다.


과감하게 공격 경영을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모험심으로 똘똘 뭉친 영화 속 고고학자 인디애나 존스를 닮았다. 1960~1970년대 패션산업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러한 그의 인생은 2005년 방송된 TV드라마 ‘패션70’의 주인공 더미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박 회장이 실제 모델인 이 역할을 이요원이 맡아 인기를 끌었다. ‘언젠가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스물세 살에 의류상점의 점원부터 시작해 예순 다섯, 패션기업 회장이 되기까지 이 악물고 걸어온 세월. 40여 년간 한 기업의 변혁을 주도한 그의 마음속엔 무슨 생각이 깔려 있는지 궁금했다. ‘박순호’식 성공사전을 제대로 펼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8월 26일 부산시 부곡동 세정그룹 본사의 회장실에서 박 회장과 마주 앉았다. 단정한 회색 정장 안에 깨끗한 흰색 셔츠를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패션 얘기로 ‘도전과 성취’란 화두를 맛깔나게 풀어놓았다.


인터뷰 중 그가 자주 사용한 단어를 꼽아봤다. 열정, 도전, 혼. 이들의 조합이 성공의 핵심이라는 그의 믿음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얘기다. 이번 방문에서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하나였다. “그 집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패션업계의 ‘인디아나 존스’가 되다


‘나는 나의 혼을 제품에 심는다’ 세정그룹에는 이 같은 사훈이 걸려 있다. 지금까지 박 회장을 떠받쳐온 초지일관의 신념이다. 올곧은 그의 브랜드 경영도 여기서 비롯된다. “패션 시장에서 인디안이 성공한 남다른 비결이 뭐냐”고 물을 때였다.


박 회장은 기자에게 ‘장사꾼은 제품을 팔고 기업가는 브랜드를 판다’는 문구 하나를 던졌다. “인디안의 40여 년 역사에 깃든 정신입니다. 제품에 불어넣은 제 혼신의 힘이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파는 기업가로 만들어 준 것이죠.” 보충 설명이 필요했다.


이어서 그는 ‘인디안은 무엇을 팔고 있을까’라는 두 번째 문구를 꺼냈다. “티셔츠? 바지? 이런 제품들이 아닙니다. 혼을 파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고객은 인디안 브랜드의 가치를 사는 거예요.


고객이 돈을 지불하는 그 가치가 아깝지 않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만들기 위해 설비 투자와 기술 개발에 아낌없이 투자를 합니다.”


브랜드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관된 품질로 소비자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 패션 브랜드의 평균 수명이 10년 안팎인 것을 볼 때 37년을 이어온 인디안은 성공을 넘어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받는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박 회장은 소신이 뚜렷했고 강단이 있었다. 고비의 순간마다 특유의 도전적 자세로 파고를 넘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한다. 세정의 전신인 동춘섬유공업사를 운영하던 1988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물건을 달라고 도매상들이 몰려올 정도로 장사는 대박이었단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첫 개발한 ‘작품’인 인디안이 재래시장 남성 캐주얼복을 평정했다고 적는 편이 옳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이 좋은 것들, 그러니까 안정적인 영업구조와 재래시장 정상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재래시장 도매 방식에서 프랜차이즈에 의한 대리점(가두점) 형태로 전환하겠다고 나선 것. 대기업과의 경쟁이 불가피한데 여기저기서 말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히 의류 제조회사였던 동춘섬유를 의류 유통회사로 바꾸는 게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회사의 근본이 달라지는 사건이었죠.” 박 회장은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한 때였다”고 회고한다. “시장 흐름을 면밀하게 분석한 저로서는 브랜드 시장이 급격히 팽창할 것이라는 전망에 확신이 섰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유통 구조를 바꿔 소비자에게 좀 더 저렴한 값에 고품질 옷을 제공하고 싶은 뜻도 있었어요.” 그는 지도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대리점을 모집하고 점포 개설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2년 만에 140여개 매장을 개설, 성공적인 전환을 이끌어냈다.


매출도 급신장했다. 그 해 120억원이던 연매출이 이듬해 280억원으로 늘었다. 1990년에는 360억원을 기록하고 이후 520억원, 660억원 등 해마다 성장세를 보였다. 현재 세정그룹의 가두점 중심 유통 대리점망은 총 1000여개로 국내 최대 경쟁력을 확보한 상태다.


박 회장은 “인디안이 국민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대리점 체제로의 전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롤 모델이 있을까. 도전 정신의 대명사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란다. 정 회장의 어록 가운데 “임자, 해봤어?”라는 말을 자주 되뇌인다고.



IMF 경제위기에 정면으로 맞서다


1990년대 TV 프로그램 ‘이휘재의 인생극장’을 기억하는가. ‘빠밤, 빠밤, 빠밤 빠밤빠바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시그널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매회 다양한 선택의 순간에선 주인공 이휘재는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며 ‘예스’와 ‘노’ 중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드라마는 선택의 대가로 성공과 실패의 상반된 결말로 치닫는 스토리를 보여준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박 회장은 이런 발상을 뒤집었다.


어느 하나가 아닌, 둘 다를 선택했다. “대부분의 리더들은 중대한 기로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꼭 선택해야 한다는 패러독스(역설)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뛰어난 리더들은 두 가지 모두를 택합니다. 둘 사이의 긴장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경영자는 때때로 양다리를 걸치고 적절한 줄타기도 탈 줄 알아야 해요.”


IMF 때였다. 대기업들은 이익 중심의 구조조정 전략으로 가두점 유통망을 포기하거나 취약한 브랜드를 정리하고 철수하기에 바빴다. 그의 회사에서도 어려운 경제 상황에 대처할 방안들이 검토되고 있었다.


임직원들 사이에서 저가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하지만 박 회장은 대표 브랜드 인디안의 제품 퀄리티를 지키고 싶었다. 여기에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공격적인 경영으로 치고 나갔다.


이 틈이 기회였다. 우선 저가 상품 판매 대신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브랜드 개발을 단행했다. 남성복 중심이던 세정의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차원에서 젊은층을 공략할 수 있는 영캐주얼 브랜드 NII를 론칭했다. 3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을 올리며 효자 브랜드로 발돋움, 결과적으로 세정의 2차 성장 동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 중심 요지에 가두점을 확보해 사업을 확장했다. 수출시장 개척에 적극 뛰어들어 패션 선진국인 미국과 캐나다에 고급 티셔츠 등을 수출하기도 했다. 이는 바이어들로부터 세정의 우수한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박 회장은 “위기가 도래하면 축소 경영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전략을 잘 세워 성장을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패션인생 37년]魂을 파는 패션그룹 세정의 ‘인디안神話’ 드라마는 계속된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우리의 꿈은 아직 진행형 궁극의 목표는 수년내 브랜드 파워를
더 키워 해외에서도 로열티를 받는 멋진 상표를 만들고 싶다.


아직도 나는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한다


부산시의 동춘상회 공장. 생산실은 일 삼매경에 빠진 직원들의 열기와 땀으로 후텁지근했다. 그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사장님은 어디 계세요? 사장실에는 안 계시던데요.” 이 회사와 거래를 트려고 온 사람이었다.


한 직원이 “저희 사장님이요? 여기 계세요. 보세요, 저기 저쪽….” 그 사람에겐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른 한 직원이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소매를 걷어부치고 땀에 흠뻑 젖은 작업복 차림의 이 사람, 그가 바로 사장 박순호였다.


그랬다. 그는 사장실에 없는 때가 많았다. 늘 현장에서 직원들과 뒤섞여 손에 가위와 원단을 들었다. 흔히 연상되는 말끔한 복장의 사장님이 아니어서 직원으로 오해받는 일이 부지기수. 정말 사장이 맞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사장이 동료처럼 직원과 함께 뛰니 분위기가 좋고, 일하는 즐거움이 더해지자 제품 하자가 줄었다. 회사 실적도 덩달아 좋아질 수밖에. 훌쩍 40여년이 지난 2011년 현재, 박순호 회장은 세정그룹의 대표로 여전히 현장을 누비고 있다. 65세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1000여개 매장을 직접 다니며 아직도 현장 경영 방식을 고수한다.


“CEO는 홍길동이란 소리를 들을수록 좋아요. 현장 어디든 임직원들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하나 된 조직은 기업의 힘이기 때문이죠. 인디안의 성장도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무한도전의 열정 패션한류를 꿈꾼다


지금 박 회장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들어있을까. “앞으로 국민브랜드 인디안이 고객의 마음에 어떤 명품으로 자리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아마도 인디안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 중에 있어요. 새로 론칭할 브랜드와 관련해서도 직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고요. 궁극적으로는 수 년 후, 브랜드 파워를 길러 해외에서 로열티를 받는 상표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여전히 ‘무한도전’ 중이다. 그리고 늘 용기백배다. 이제 박 회장에게 처음 가져왔던 질문을 꺼내야겠다. “도대체 그 집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어떻게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열정을 갖고 도전해 왔나요.” 그가 말했다. “사업가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했습니다. 그 자존심은 언제나 오늘 내가 만든 상품 속에 담겨 있으니까요.”



그의 가슴은 항상 헐벗은 곳을 향해 있었다


■박순호 회장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시골마을에서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가난했다. 다섯 발가락이 모두 나올 정도로 신발이 닳아 없어져도 살 돈이 없었다. 가정 형편상 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기에, 중학교만이라도 마치게 해달라고 부모님을 여러 번 졸랐다. 열 여섯 살에 마산 ‘동양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독학으로 주산을 배우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다.


■도시로 건너와 메리야스 도매상에서 일할 때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눕거나 무릎을 꿇고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자는 날이 많았다. 겨울엔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한 번은 가게 한 구석에서 자다가 동상에 걸린 적도 있었다.


■박 회장의 기부 활동은 왕성하다. 지금까지 개인 기부금액만 30억원이 넘는다. 200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추진하는 행복한 연금나눔 캠페인에 참여, 자신의 국민연금을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는 ‘은빛연금 기부자 1호’에도 선정됐다. 올 봄에는 사재 30억원과 세정 법인에서 출연한 300억원 등으로 세정나눔재단을 설립했다.


‘가난+고생+타인→베풂’. 박 회장의 가슴엔 이런 단편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나눔 활동은 배고팠던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제는 주변을 돌보는 일이 습관처럼 체화됐다고. 특히 박 회장은 ‘투자’의 기부학을 얘기했다.


“기부는 사회 발전을 위한 투자예요.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실천 행위죠. 기업들이 보다 전략적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그는 세정나눔재단을 통해 사회복지시설과 단체에 대한 지원, 장애인과 소년·소녀 가장 등 저소득층 돕기, 장학금과 학술·문화·예술·체육 활동 지원 등의 사업을 벌인다. 옷과 좀 더 따뜻한 세상, 잘 어울리는 궁합이었다.


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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