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배우 박철민을 즉흥적인 사나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입만 열면 수돗물처럼 쏟아지는 그의 애드리브가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더치커피 같은 기다림의 결과라는 것을, 짧은 순간 과녁을 통과하는 웃음을 위해 그가 지난 밤 얼마나 많은 화살을 쏘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박철민 씨가 연기한 숲의 공인 중개사 ‘달수’가 그를 닮은 건 단지 여유로운 표정과 화려한 입담만은 아닙니다. 다른 동물들에게 집을 구해주고, 고민도 들어주고, 모든 일에 참견하지만 정작 달수의 집은 어디인지, 어떤 고민을 안고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남자. 그러니까 이 인터뷰는 배우 박철민과 나누는 짧은 악수 정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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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어제 개봉했고 <7광구>가 그 다음주에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현재 영화 <코리아>를 찍고 계시고, 게다가 월화 드라마 <무사 백동수>까지. 이건 거의 아이돌 스케줄이신데요.
박철민: 아이고 무슨 아이돌까지. 그나저나 비가 이렇게 오다니 걱정이네요. <마당을 나온 암탉>은 부모님들이 아이들 데리고 많이 오실 텐데, 비 때문에 극장 찾는 사람이 적을까 봐 걱정이죠.
“밋밋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작은 디테일에 제안을 많이 하는 편”
100: 일단 보고 나온 사람들의 입소문이 엄청나지 않을까요. 심지어 기자 시사회에서도 이성을 잃고 우는 분들도 많으시던데요. 원작동화에는 없던, 영화에 새롭게 창조된 수달 캐릭터가 바로 박철민 씨가 목소리를 연기한 ‘달수’인데요. 달수 캐릭터가 너무 사랑스럽고 그 존재감이 생각 이상으로 크더라고요. 먼저 배우가 녹음을 한 후에 작화 작업을 해서인지 수달의 얼굴이 보면 볼수록 박철민 씨를 닮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박철민: 코가 닮았다, 입이 닮았나, 이런 건 없는데 전체적인 느낌? 표정이나 동작에서 나오는 친근하면서도 넉살 부리는 느낌 같은 게 나랑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죠. 주변에서도 수달과 싱크로율이 넘친다고 하니까 신나고 기분 좋아요. 기본적으로 지금의 달수와 비슷한 밑그림 위에 시작했지만 목소리를 녹음하면서 말의 느낌, 재미들이 더해지면서 손동작이 나오고 표정들이 나오니까 그림들과 하나가 되는 일치의 과정들이 넉넉했죠. 외국 애니메이션 그대로 가져와서 더빙만 하는 거랑은 그 차이가 있을 수 밖에요.
100: 달수가 말하는 “세월아 너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 가면 어떡하니” 같이 무심코 툭-던지는 듯한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박철민: 암탉 잎새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계절을 느끼는 장면이었는데, 그건 애드리브에요. 제가 가끔씩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정말 이 세월은 우리와 상관없이, 양해 없이 지나가잖아요. 물론 그런 게 자연의 법칙이고 섭리겠지만 내 나이쯤 되다 보니까 막 억울한 거야. (웃음) 야속함, 아쉬움도 있고, 그건 죽음하고 가까워진다는 거니까 두려움도 있고. 이 장면에 너무 어울리는 것 같아서 써봤는데 그 대사를 언급해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100: <목포는 항구다>에서 ‘아싸 가오리’가 개사료를 먹거나 <뉴하트>의 ‘뒤질랜드’ 배대로가 요구르트 얼려서 먹는 것 같은 설정 같은 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캐릭터를 기억하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철민: 가능한 선에서는 모든 장면이 그냥 밋밋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작은 디테일에 대해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물론 오버해서 많이 잘리기도 하고, 편집에서는 살았는데 대중들에게는 오버로 느껴지기도 하고. (웃음) 그런데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미 짜여 있고 컨트롤 되어 있는 세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건 정말 쉽지 않거든요. 거기엔 용기와 건방이 필요해요. 무모한 도전이. 사실 그런 것들을 잘하는 배우가 많이는 필요 없어요. 하지만 한 명쯤은 나같이 모난 놈이 있어서 이 짜인 세계를 조금만 흩트려놓을 수 있다면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고집하기도 하고, 아이디어 내기도 하죠. 물론 그게 채택되면 신나고 기쁘지만 감독님이 그건 좀 아닌데요. 하면 아유, 이걸 왜 내가 꺼냈지? 추잡스럽게, 하는 쪽 팔림이 있긴 해요. 하지만 묵살 당했다고 절대 쪽 팔려 해선 안돼요. 그럼 다음에 또 못하니까. 그냥 그러죠. 감독님 절대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냥 쳐 본 거야~. (웃음)
100: 사실 평범하게 가면 아무도 모를 텐데 어떻게든 특징을 만들어주는 연기는 그 수위에 대해 관객과 시청자들과 줄다리기를 계속 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잖아요.
박철민: 극에서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오버는 필요하고 그걸 제가 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지나친 오버는 늘 고민하고 경계하고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사 백동수>도 초반 제 연기에 대해 너무 오버한다는 부정적인 지적들이 있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맞게 가고 있나 돌아보기도 했죠. 드라마는 거의 동시상영 수준으로 찍으니까 반응들을 체크하면서 고쳐가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가졌던 생각들은 이어가기도 하고 그러죠. 작가는 아무래도 주인공 중심으로 큰 드라마의 틀을 생각하게 되니까 그 역할을 맡은 조연이 숲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나무를 손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좀 더 살아나서 꿈틀거리게끔. 저는 그런 과정에 좀 더 익숙한 배우이지 않나 싶어요.
100: 그런 감을 잡으려면 전체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고민을 주인공보다 더 많이 해야 하지 않나요?
박철민: 그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워낙 활자를 만나는 걸 힘들어하니까 (웃음) 부모님은 깊이 원하셨으나, 책하고 워낙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12개 팀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리그에서 제가 타격 1위예요”
100: 책하고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뭐하고 가까운 소년이었나요?
박철민: 공하고도 가깝고, 땅하고도 가깝고, 친구하고도 가까운 사람이었죠.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중학교 때는 야구를 할까 연기를 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집에서 강하게 반대를 해서 몇 대 줘 터지고 그만뒀죠. 지금은 아마추어 동호인 야구단을 하는데, 이름은 <스카우트>의 시 제목에서 따온 ‘비광’인데 거기에 푹 빠져 살아요. 솔직히 촬영보다 야구하러 가는 게 훨씬 설레요. 스트레스 풀기도 하고 체력관리도 하고 인생의 재미도 느끼고. 어릴 적부터 좋아한 게 연기랑 야구인데 연기는 직업이 되었잖아요. 스트레스, 책임, 결과에 대한 압박이 당연히 따르고. 그런데 야구는 그냥 좋아하는 거니까 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그 과정만 신나면 되는 거야. 너무 큰 엔도르핀을 주는 즐거운 일이에요.
100: 요즘 같은 스케줄에서는 야구하는 시간을 빼기도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박철민: 이건 극비지만, 아주 중요한 경기는 다른 작품이 있다고 하고…. (웃음) 12개 팀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리그도 있는데 제가 타격 1위예요. 7할 1푼 2리! 그 야구 잘한다는 장진 감독도 아마 4, 5위쯤 될 걸? 아마도 저의 이런 급격한 실력향상은 김주혁과 찍은 야구영화 <투혼> 덕인 것 같아요. 촬영 중에 코치들에게 강습을 많이 받았거든요. 특히 힘 빼는 거에 대해. 가만 보면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연기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힘을 빼야 돼. 그런데 힘 빼는 게 정말 힘든 거죠. 기초단계에서는 오히려 힘을 뺄 수가 없어요. 기초가 없으니까 바로 무너져 내려버리거든. 그런데 다들 처음부터 힘 빼라는 말만 하잖아요. 연기도 축구도, 수영할 때도. 그런데 처음엔 힘 빼면 가라앉지. 야구 기본 메커니즘을 알고 작년에 힘 빼는 법을 배우고 나니까 타율이 늘었던 것 같아요. 타석에서 확실히 느끼거든요. 내가 힘을 빼고 있다는 것이.
100: 연기에 있어서 힘을 빼고 있구나 느낀 건 언제에요?
박철민: 아직도 힘을 제대로 못 빼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에서 힘을 빼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연기의 어느 순간에 가 있을 때일 것 같아요. 여전히 잘 안돼요. 하다 보면 뜨거운 열정이랄까, 뭔가 조절 못 하는 힘이 툭 튀어나와서 만족도가 떨어지더라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정말 힘을 빼고, 어떤 경지에서 연기하는구나 라고 스스로 느낀 작품은 하나도 없었어요.
100: <화려한 휴가>에서 연기한 택시기사 인봉이 “성격상 뒤에는 못 있겠다, 나가봐야 쓰겠어”라며 군중 앞으로 뛰쳐나가시는데 박철민 씨 역시 성격상 뒤에는 못 있는 사람이었나요?
박철민: 비슷했던 것 같아요. 지금하고. 어릴 땐 나름 우울하기도 했었고.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 때는 너무 명랑하지만, 초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혼자 이불 뒤집어 있으면 한 번씩 죽음도 생각하고, 엄마가 안 돌아오면 어떡하나 우울의 나락에 빠져들기도 하고. 누구도 그랬겠지만 반복적인 조울이 컸던 편이었죠.
100: 대학교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고, 비둘기도 잡아먹었다는 전설을 들어보면 정말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박철민: 누가 놀자고 하면, 그럼 우리 끝없이 놀아볼까? 이 집에 있는 술 다 먹어볼까? 한자리에서 맥주를 몇 박스를 먹을 수 있을까? 수업을 계속 빠지면 과연 얼마나 빠질 수 있을까. 아니 언제까지 빠질 수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도전을 일삼고, 그에 따른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살았죠. 동시에 굉장히 많이 감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기쁨과 슬픔의 폭 자체도 크고, 사물이나 일이나 사람에 대한 판단도 이성보다는 감성이 센 그런 사람이죠.
100: <7광구>의 캐릭터도 허풍이 꽤나 센 사람인데, 특별히 기억나는 허풍이 있으신가요.
박철민: 구체적으로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마도- 일상이 허풍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좀 더 오버 되고 과장해서 늘 자신 있어 하죠 허풍도 많이 치고. 그러고 돌아서서는 불안해하고. 누구보다도 망설이고. 대학교 때, 내일 집회가 잡혀 있고 나는 학생회장인데 너무 바다가 보고 싶더라고. 그래서 야! 무전여행이나 가자. 하고 동아리 후배를 데리고 장항선 끝까지 기차도 몰래 타고 가서 교회 들어가서 밥 얻어먹고 돌아왔거든요. 결국 그 중요한 집회에 늦게 나타나면 후배들께서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렇게 막사시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죠. 그러면 얘들아 나는 좀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왔다, 좀 더 많은 민중의 고통과 고민들을 만나고 왔다, 이런 그런 허울 좋은 말을 내뱉곤 했죠. 사실은 신나게 놀고 온 거면서 (웃음).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교과서는 소설 <태백산맥>”
100: ‘민주대머리’라는 잊기 힘든 별명하며, 대학집회의 선봉에 선 인기스타셨다면서요.
박철민: 사실 그 때 느꼈던 뜨거운 열정이나 판단 생각 행동들이 변질되지 않고 퇴색되지 않고 탄탄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 학교 다닐 때의 활동들이 자랑스럽고 별이 될 수 있었겠지만 지금 나의 생활은 개인적인 생각,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사랑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지나왔던 학생운동의 작은 역사들이 부끄럽지도 않고 자랑도 아닌 거예요. 많은 사람을 위한 이타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너무나 많이 흐트러져서 유지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굳이 꺼내서 내가 이런 삶을 살았다고 자랑할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그 뜨거웠던 시절에, 나 역시 뜨거웠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쪽 팔리는 건 더욱더 아니고.
100: <스카우트>, <화려한 휴가>도 <위험한 상견례>에서도 그렇고 전라도, 광주라는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역할을 해오시기도 했어요. 광주란, 전라도란 곳은 박철민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단지 고향을 너머서……
박철민: 이제는 단지 고향이죠, 그런데 고향은 단지가 아니거든요. 고향은 자기의 수많은 것들을 탄생시키고 출발시킨 곳이잖아요 부모로부터, 친구로부터, 땅으로부터 그 지역 색깔로부터 모든 게 출발하니까. 그래서 단지 고향이기도 하고 그래서 단지가 아니기도 한 것 같아요, 내 말투 내 버릇, 세상을 보게 하는 생각들이 다 거기서 자란 거니까. 내 말을 가장 신나게, 맛있게 할 수 있는 그곳의 언어고.
100: 그렇게 쫀득쫀득한 말들을 만들어 내는 기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그 근원이 궁금해요. 혹 글을 많이 쓰는 문학청년이었을까, 아니면 유독 남의 말을 잘 기억하는 사람일까?
박철민: 집안은 다들 문장력이 있었죠. 누나는 지금 활동은 안 하지만 등단도 하셨고. 그렇게 나머지 3형제들은 책을 많이 봤고 나는 책을 못 봐서 긴 문장 긴 이야기를 해내는 능력은 떨어지는 것 같고, 대신 짧지만 빗대서 만드는 능력들은 그래도 좀 탁월하지 않나 생각해요.
100: 특히 그 문장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만나서 화룡점정이 되는 것 같고요.
박철민: 아버님이 선생님이셨는데 학기 초 수업 첫 시간 들어가면 늘 박수를 받고 나오신다는 말을 들었어요. (웃음) 이빨을 쫙 까시는… 어쨌든 당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 확인할 길은 없고. (웃음) 아무래도 저에게 있어 가장 큰 교과서는 소설 <태백산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에서 말을 만드는 기본 원칙을 배웠고, 말의 맛을 배웠던 것 같아요. <불멸의 이순신>에서 쓴 “못생긴 년이 거울 깬다”는 말은 직접 인용한 경우고 자주 읽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고요.
100: <부자의 탄생>에서 “지네 지 다리 세다가 숨넘어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같은 대사 말씀이신가요? (웃음)
박철민: 예, 그것도 제가 만든 말이거든요. 다람쥐 쳇바퀴 돌다가 멀미할 놈아. 이런 식의 방법을 배운 거죠. 동물들을 비유해서 만들어 놓은 게 몇 개 있어요. 그리고 이런 말장난을 하는 캐릭터를 만들어보자 하고 거기에 빠져들면 막 이상한 말들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걸 기억을 못해. 아마 내가 기억력이 뛰어났으면 예능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는 인물이 되었을 텐데.
“벽이나 틀 같은 걸 깨는 건 늘 좋아해요”
100: 연극에서 영화로 드라마로 옮겨오시면서 혹 슬럼프 같은 걸 겪기도 하셨나요.
박철민: 내 연기에 답답해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질곡에 빠진 적은 있었지만 전체로 봤을 때는 슬럼프나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어요. 연극에 심취된 형이 어머니 지갑을 털어서 서울 가서 연극한 편을 보고 와서 나를 뒷마당에 앉혀놓고 재공연 해주었던 그 첫 순간. 그렇게 연극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행복하고 늘 최고의 날이었어요. 물론 무명이어서 좀 더 박수 받고 싶어서 안달한 적은 많지만, 유명해져서 많은 대중을 만나고 싶었던 적도 많지만, 못 만나고 있는 순간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때도 늘 무대를 준비할 수 있었고, 늘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요.
100: 얼마 전 <수미옥>에 나오셔서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형님 이야기, 박철민 씨를 “친한 사람, 잘 아는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어머니 병환을 이야기하시는 걸 보면서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특히 배우 선배이자 어린 시절 멘토였던 형님의 죽음은 당시보다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더욱 힘들어졌을 것 같아요.
박철민: 아뇨 오히려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성인이 된 이후엔 형은 정통연기를 했고 나는 막 연기, 마당극 같은 걸 했는데, 그때부터는 배우로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가족이 된 거죠. 지금은 이 사람을 너무 잊고 살아서 고통스러워요. 며칠 전에 저와 예전에 <이바구 세상>이라는 2인 마당극을 오래 했던 친구가 죽었어요. 암 투병을 하면서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자주 찾지도 못했죠. 안동에서 <코리아>를 찍고 있다가 비보를 들었어요. 그런데 눈물이 안 나더라고. 그런데 딱 영정사진 보면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데, 아- 나에게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구나 했어요. 대성통곡은 이렇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 친구하고 400회 공연하면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엉엉 정말 정신을 놓고 울었어요. 앞으로 대성통곡 할 장면이 나오면 이렇게 하는 게 리얼한 거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100: 연극도 준비 중이시라면서요.
박철민: 예. 내년 초가 될 것 같은데. <대한민국 김철식>이라고 한국판 돈키호테 같은 이야기예요. 연출자가 너 혹시 잘되면 나중에 꼭 재공연 한 번만 하자, 그냥 놓기는 아까운 작품이라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약속을 지켜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물론 고등학교부터 60살까지 소화해야 하고, 발차기에 활극도 나오는 연극이라 체력적으로도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100: 요즘에는 예전처럼 즉흥적인 삶은 살지를 못하시죠?
박철민: 아무래도 막-살진 못하죠. 여기저기 소셜 네트워크들이 언제나 지켜보기도 하고. (웃음) 하지만 나 같은 거는 분명히 대중들이 외면하기도 하고, 안 찾기도 하고, 기억 못 하기도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지금은 당분간 이렇게 살다가 그때 좀 흐트러지자. 그런 생각해요.
100: 한동안 박철민 씨의 ‘시상소감’이 화제가 되었잖아요. 그 역시 철저한 준비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 들었습니다.
박철민: 당연히 준비했죠. <위험한 상견례> 찍는 중에 요청이 와서 후보도 안 올랐는데 거길 왜 가냐 했었죠. 그런데 감독님이 거기 가서 영화홍보도 좀 하고 그러라는데, 뻔한 홍보하는 건 너무 싫고 그럼 시상소감을 해볼까, 하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신인상 수상이었는데 이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주연상, 감독상을 시상하는 그날까지… 딸들아 헷갈리지 마라, 아빠 수상 아니다, 시상이다. 덕분에 검색어 순위 1위에도 올라가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벽이나 틀 같은 걸 깨는 건 늘 좋아하니까요. 아까 말했듯이 이 역시 용기와 무모함이 동반되어야 해요. 저거 뭐 하는 짓이야, 하는 반응을 늘 대비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순간 쪽 팔리면 되죠 뭐. (웃음) 지금도 뭔가 하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꿈틀거리고 있는데, 주변에서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다들 말리더라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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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사진. 백은하 기자 one@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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