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 뚜껑을 열 때의 독특한 소리와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각형의 ‘지포(Zippo)’ 라이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지포라이터는 미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도 6·25 이후 전래되면서 중장년층 애연가들에게 널리 사랑받았던 제품이다.
이러한 지포라이터가 정작 본고장 미국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점차 번져가고 있는 금연 붐이 원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 80년 전통의 라이터업체 지포가 대대적인 변신을 꾀하는 한편 해외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몇 년간 미국에서는 주요 건물 내 금연이 제도화되는 등 금연운동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최근 조사 결과 미국 흡연자 수는 4600만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흡연인구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지포라이터같은 비싼 제품의 매출 감소로 이어진다. 거기에 2001년 9·11테러가 터진 이후 항공기 등을 탑승할 때 라이터나 칼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규제가 강화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절정기였던 1996년 지포의 ‘방풍(防風)’라이터는 1730만개가 팔리면서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했지만 이 해를 기점으로 급감했다. 올해 지포는 라이터 판매량을 1150만개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는 연간매출 2억달러 중 54%에 불과하다.
지포는 내년부터 야외용 그릴·랜턴·히터·손전등과 같은 아웃도어 제품으로 회사의 주력을 옮길 계획이며 한편 향수·시계·남성의류 등 전혀 새로운 분야로까지 사업 영역을 다변화하고 있다. 그레고리 W. 부스 지포 최고경영자(CEO)는 “대중들은 지포하면 바로 라이터를 떠올릴 정도로 너무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다양한 발화용제품을 통해 이같은 통념을 바꾸고 있다면서 “사람들이 꼭 담배를 피울 때에만 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광고회사 케첨애드버타이징의 리 세인트 제임스 크리에이티브디렉터는 “브랜드의 확장이나 전환이 본래 뿌리와 너무 멀어질 경우 실패하기 마련”이라면서 미국을 상징하는 또다른 아이콘인 ‘할리데이빗슨’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할리데이빗슨은 오토바이에 집중됐던 사업영역을 다른 분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브랜드의 가치를 적극 활용했다”면서 “지포 역시 기업 역사와 전통, 상징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포는 해외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현재 지포의 총 매출 중 해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이른다. 특히 흡연인구 3억명 이상의 최대 시장인 중국을 비롯해 인도 등 신흥국 시장에서 매출이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 지포라이터 매출은 지난 10년간 매년 30%씩 증가했으며 인도 시장에서도 지난해 69% 뛰었다.
불과 5년전에 중국산 ‘짝퉁’ 지포라이터가 미국 시장까지 유입되면서 지포가 모조품 제조업체들을 제소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중국 현지에서는 가짜 지포라이터가 범람하고 있음을 볼 때 이는 상당한 선전이라 할 수 있다.
피츠버그대학 기업우수성연구소의 앤 듀건 디렉터는 “지포는 중국 소비자들에게 진품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가격도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현지 시장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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