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포스가 무너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양신도 사라졌다. KBS <부활>과 <마왕>에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여주며 ‘엄포스’로 불린 엄태웅과 최다홈런, 최다안타, 최다득점 등 수많은 기록을 남긴 채 그라운드를 떠난 ‘양신’ 양준혁이 KBS <해피선데이>의 ‘1박 2일’과 ‘남자의 자격’에서는 이제 막 예능을 익히고 있는 귀여운 막내일 뿐이다. 예능 프로그램 경험이 전무했던 탓에 파격적인 섭외라는 말과 함께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두 사람. 야생의 늪에서 뒹군 지 각각 2개월, 1개월이 지난 지금,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을까. 친화력, 예능감, 생존력, 캐릭터 구축력을 기준으로 엄태웅과 양준혁의 적응력을 분석해보았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둘 다 잘하고 있다.
엄태웅: 미안한 얘기지만, 첫 등장부터 ‘포스’ 따위는 없었다. 아침 9시 미용실 예약은 저 멀리 날아갔고, 엄태웅에게 남은 건 달랑 속옷 하나와 호피무늬 이불 그리고 어깨에 선명하게 남은 이불자국뿐이었다. 첫 만남부터 무작정 집을 습격하는 미션에 부담감을 느꼈던 기존 멤버들도 그의 ‘허물없는’ 옷차림에 친근감을 느꼈다. 덕분에 은지원은 거리낌 없이 그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줬고 강호동은 덜 익은 달걀 프라이를 먹이면서 단 20분 만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반쯤 감긴 눈, 헝클어진 머리, “흐흐흐흐” 혹은 “으흐흣”과 같은 사람 좋은 웃음. 이보다 더 인간적일 순 없다. 심지어 만난 지 하루도 안 돼 강호동, 이수근과 함께 샤워를 하며 ‘OB라인’을 형성했으니, 이승기가 지어준 별명 ‘엄코’(엄태웅 코미디언 라인)가 딱이다.
양준혁: 화려한 플래카드도, 기존 멤버들의 우렁찬 호명도 없었다. ‘귀농일기’ 편에서 기존 멤버들이 ‘남자의 자격’ 2주년 파티를 하기 위해 잠시 불을 끈 사이, 양준혁은 방문을 스-윽 열고 들어와 방구석에 앉아 씨-익 웃으며 구수하게 등장했다. 첫 만남, 나이가 아닌 예능 경력으로 서열을 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예능 선배 노릇을 하려던 이윤석을 어깨동무 한 번으로 “형님, 존경합니다. 전 형님의 것입니다”라고 굽신거리게 만들었다. 세 번째 촬영, ‘남자, 살아서 돌아오라’ 편에서 마지막 소원으로 무인도 탈출을 제안하는 제작진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없으면 이 사람들 죽어, 차라리 태원이 형님 먼저 내보내야지”라며 벌써부터 김태원을 챙겼다.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고 걱정하던 그가 한 달 만에 멤버들과 뜨거운 형제가 되었다. 이경규가 자신의 영원한 ‘심복’ 이윤석을 양준혁에게 뺏길까봐 전전긍긍했던 것이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엄태웅: 스스로 순발력이 약하다고 인정했다. 이승기마저 “형은 무당이에요. 없을 무(無)”라고 말했다. 멤버들끼리 손발이 맞아야 제작진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건만, 강호동이 설마 혼자 야외취침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도 “예, 저는 괜찮아요”, 강원도 양양까지 뛰어갈 수 있냐고 물어도 “예, 뭐, 흐흐흐”라며 상대방을 맥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가파도 여행부터 그의 예능감에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엄정화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는 질문에 소주라고 폭로하질 않나, 멋진 양복차림으로 막춤을 추고, 자신과 수애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강호동의 낚시질에 “어우, 누나가 진짜 잘 어울린대요!”라고 자폭까지 했다. 자신을 내려놓아야 뭔가 터진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르고 보는 협상능력은 강호동에게, 멘트를 던지는 타이밍은 이승기에게, 애드리브는 이수근에게, 동물적 감각은 은지원에게 배워라. 그리고 김종민에게 좀 가르쳐줘라.
양준혁: 예능감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양준혁이 ‘남자의 자격’에 합류해 지난 한 달 간 소화했던 미션을 생각해보라. 말없이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버텼던 게 전부다. 제아무리 ‘예달’ 이경규 선생이라도 애드리브나 순발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미션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각종 애드리브와 개인기를 연마한 전현무 아나운서가 새 멤버로 합류하기 때문이다. 전현무가 형님들 앞에서 샤이니의 ‘루시퍼’를 추는 순간, 양준혁은 ‘뭘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막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러니 빨라져야 한다. 행동도, 말도, 눈치도.
엄태웅: “이미 2년 정도 같이 한 것 같아요.” 이수근이 엄태웅에게 말했다. 그것도 첫 날에. 비단 수수한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6개월 만에 터득할 노하우를 단 하루 만에 습득했다. 비록 구구단은 마의 숫자 ‘49’ 때문에 실패했지만 최고난이도였던 낙오 미션을 성공했다. 총 세 번의 히치하이킹을 통해 나홀로 낙산 해수욕장을 찾아오자마자 멤버들과 함께 입수까지 했다. 안 자른 삼겹살, 구두 차림의 등산은 이제 익숙해졌다. 어디에 내놔도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 밥 냄새에 가장 먼저 일어나 제작진에게 ‘한 입’을 요구하는 모습은 거의 ‘1박 2일’ 원년멤버 수준의 생존본능이다.
양준혁: 별 다섯 개로도 모자랄 사상 최고의 생존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무인도에서의 24시간은 양준혁의, 양준혁에 의한, 양준혁을 위한 미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구 해설 때문에 자정이 넘어서야 무인도에 도착했지만, 그 곳은 양준혁이 오기 전과 후로 나뉠 정도로 확연히 달라졌다. 김국진, 이윤석, 김태원이 힘에 부쳐 결국 이불로 사용했던 천막으로 뚝딱 집을 짓더니, 파도에 떠밀려 온 스티로폼 덩어리를 구해 바람막이로 사용하고 달랑 봉 하나로 조리용 화덕을 만들어 계란까지 삶았다. 저녁 잠자리도, 아침 식사도, 양준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곧 다가올 배낭여행 미션에서 양준혁은 ‘함께 여행가고 싶은 멤버 1순위’로 뽑힐 게 분명하다. 그만큼 든든한 파트너다.
엄태웅: 첫 날 강호동이 손수 양말을 신겨주고 달걀 프라이를 먹여줄 때부터 그의 손길에 반한 모양이다. 김종민의 이간질에 “호동이 형, 그런 형 아니야”라고 반박하면서 엄태웅의 ‘호동빠’ 기질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15년 우정의 김종민은 “사실 만난 건 몇 번 안돼”라며 매몰차게 뿌리쳐놓고, ‘1박 2일’에 합류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강호동에게는 “형이 하는 건 뭐든 다 옳은 것 같아요, 흐흐흐”라며 무한 신뢰와 애정을 쏟아 부었다. 강호동이 코를 골아도 실내취침을 함께 할 멤버로 선택하고 그가 억지를 부려도 실망은커녕 속이 시원하다고 하니, 이 정도면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맏형을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해맑은 남동생 이미지는 멤버들의 리액션을 이끌어내기도 쉬울뿐더러 강호동의 귀여운 오버액션까지 포용하고 있다. 가장 놀라운 건, 이토록 막강한 캐릭터를 신입생 엄태웅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양준혁: 김태원이 다짜고짜 “애들은?” 이라고 공격해도 허허- 웃으며 넘겼다. 오히려 제작진에게 “여긴 누구 소개도 시켜줍니까?”라고 물어보면서 스스로 노총각 캐릭터를 이용하기도 했다. 하프마라톤 몰래카메라를 당하고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형님 완주하는 거 보고 얼마나 감동 받았는데”라며 김태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밤늦게 무인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도 줄곧 김태원 걱정뿐이었다. 겉보기엔 거칠고 투박한 대구사나이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심하고 마음씨 좋은 대구댁이다. 아직까지 멤버들이 불러주는 뚜렷한 별명은 없지만, 미션을 하나씩 수행할수록 꼼꼼한 이윤석이나 성실한 윤형빈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간의 행동을 미루어보아 ‘태원빠’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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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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