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의 역발상]물품 '인도'와 '인수'는 엄연히 다르다](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0122612532502261_1.jpg)
물품의 인도(delivery)와 인수(acceptance)는 비슷한 단어같지만 법률적으로는 뜻이나 기능이 매우 다르다.
내가 근무했던 글로벌 외국계 회사에서의 사례를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물품을 파는 세일즈맨들조차 금방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도록 일깨워주는데 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회사의 법률전문가가 그 차이마저 모르고 있다면 글로벌 회사라 할 수 있을까.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현실이었다.
정확하게 '인도'는 물건의 도착이고 '인수'는 검수를 한 후 인수증을 끊어줄 때 생기는 행위다. 인수와 인도 사이에는 소유권과 손실위험이 이동한다. 계약서 상 물품 인도시에 소유권 등이 이동된다고 명시돼 있어서다. 또 검수 과정에서 요구한 스펙과 맞지 않으면 물품을 반환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구매자의 권리다. 그래서 인수시점은 인도의 경우보다 훨씬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판매자에게는 배에서 내려놓는 순간 소유권을 넘기고 청구권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물론 구매자는 즉시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검수가 필요해서다. 지불청구권에 대항할 요건 즉, 검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대항요건이 생기기 때문이다. 판매자로서 구매자가 물품을 인도받아 검수에 들어가, 반환까지 다 하고나서 인수했을 때에만 돈 받을 권리가 생긴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글로벌 회사의 법률전문가는 물론 CEO조차 인식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고 사전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괴로워했다.
이들은 판매회사로서 구매자가 인수하고 돈을 지불할 때까지 소유권을 보유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면서도 인수하는 사이에 생기는 손실위험(risk of loss)은 판매회사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입사한지 2주밖에 안된 입장이었지만 CEO에게 조언을 해야 했다. 그 CEO는 구매자와 협상에 나가며 최종 인수과정까지 소유권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었다. 일반 세일즈맨들조차 알 수 있는 내용인데도 법률적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지만, 공정한 거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계약서에 구매자가 봐도 어색한 조건을 들이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러면서도 글로벌 기업이란 곳에서 상식차원의 법적 이해를 하지 못한 채 하고 쩔쩔매는 것은 조직이 그만큼 부패해서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된 법률지식만 갖고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을 CEO까지 나서 고민하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소모적인 일인가. 자질없는 전문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경우 회사는 고생을 사서하는(asking for trouble)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격없는 전문가를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우면 그만 아니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이라는 조직이 오랫동안 부적절한 전문가와 함께 해왔다는 것만으로도 '부패가 만연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힐러리 앤드 톰슨 파트너스 대표(hjthomp@hotmail.com)
*김희정 씨는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인턴생활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L그룹에 이어 외국계 기업의 법률 전문가로 활동해오다, 얼마 전 '힐러리 앤트 톰슨 파트너스'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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