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92년 10월 과천 구치소. 하얀 복도를 통과하는 김태원(45)은 눈앞이 캄캄했다. 포승줄에 묶인 두 손. 냉기 고인 발은 점점 세상과 멀어졌다. 철문이 열리자 이내 쇠창살이 온몸을 옭아맸다. 앞으로 할 일은 잘 알고 있었다. 5년 전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혐의도 대마관리법위반이었다.
지독한 악연은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1975년 국내음악은 록, 포크, 고고 등 다양한 장르의 꽃이 피었다. 화려함은 길지 않았다. 그해 12월 주역이던 이장희, 신중현, 윤형주 등 음악인 50여명이 대마초 흡연으로 굴비 꿰듯 구속됐다. 그들의 노래를 즐겨듣던 김태원은 대마의 정체가 궁금했다. 10살 어린이의 눈은 가벼웠다. 동화 속 묘약을 보는 듯 했다. 본모습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대마를 실감한 건 그로부터 10년 뒤였다. 1985년 김태원은 처음으로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디 엔드 멤버들을 주축으로 결성한 부활이 데뷔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다. 넉넉한 주머니 사정은 어린 시절 호기심을 떠올리게 했다. 김태원은 큰 고민 없이 대마가 암암리에 거래되던 이태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맛만 보려고 했다. 은박지 속 1g이 그렇게 무서울지 몰랐다."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에 정신은 몽롱했다. 판단력이 흐려지더니 곧 환각상태로 이어졌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알 수 없었다.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는 사실을. 중독성은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강렬했다.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몸이 따르질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1987년 김태원은 10살 때 텔레비전을 통해 본 음악인들처럼 포승줄에 묶였다. 구치소로 끌려가는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대마 후유증과 수감생활을 동시에 견딜 자신이 없었다. 쇠창살이 눈앞을 가로막자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부활의 성공으로 막 효도를 하려던 참이었다. 다시 불효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사랑과 평화'가 부른 '어머님의 자장가'를 읊조렸다.
진심을 담은 노래는 눈물을 쏟아내는 전염병이었다. 각 방마다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재소자들에게 김태원의 목소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첩과 같았다.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서로 의지하며 수감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
두 번의 구치소 경험은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가족의 소중함, 여자 친구의 사랑. 음악의 소중함까지. 아침공기 맞으며 두 번째 두부를 먹던 날, 김태원은 굳게 다짐했다. 대마를 끊고 다시 새 출발하겠다고. 결연한 표정 뒤로 구치소는 점점 멀어졌다.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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