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84년 서대문구 영천시장은 음악인들로 북적였다. 그래서 입구에 위치한 서문악기사가 록의 메카로 떠올랐다. 김태원(45)은 진원지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단골손님이었다. 거의 매일 합주연습실을 빌려 기타를 연습했다. 손놀림은 전광석화처럼 재빨랐다. 속주가 잘 치는 연주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시대. 김태원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의 손을 닮고 싶었다.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김태원은 갈고닦은 실력을 무대에서 선보였다. 마산, 광주를 전전하다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용인관광카바레였다. 연주는 중노동이었다. 매일 3시간 이상을 무대에 서야했다. 피로는 뜨거운 호응 덕에 겨우 잊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취객이었다. ‘딴따라’로 시작하는 곤욕은 매번 그를 초라하게 쓰러뜨렸다.
“음악에 투신한 뒤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겼다면 일찍 그만뒀을 거다.”
하루 일당은 천 원. 빠듯한 살림에 끼니는 숙소에서 해결했다. 밥상은 단출했다. 신 김치 하나로 밥을 넘겼다. 대충 허기를 때우면 인근 다방에서 휴식을 가졌다. 쌍화차를 시켜놓고 음악을 만끽했다. 찻값을 계산하고 남는 돈은 모두 합주연습실 대여료로 사용했다. 숙소에서도 연습은 가능했지만 도태할 것을 우려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서문악기사에서 바람은 이뤄졌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들을 만나 정보를 교류했다. 뜻을 함께 할 친구들도 만들었다. 트럼펫 연주로 알게 된 베이시스트 이태윤을 비롯해 드러머 황태순, 기타리스트 이지웅과 밴드를 결성했다. 이름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막 ‘디 엔드(The End)’로 지었다.
김종서가 보컬로 합류한 뒤 디 엔드는 공연을 기획했다. 김태원은 연주 외에 홍보를 맡았다. 명동, 대학로 등을 동분서주하며 전봇대와 건물 벽에 전단지를 붙였다. 엄연한 불법 행위였다. 경찰관을 따돌리지 못하면 어김없이 파출소로 끌려갔다. 훈계를 받고 풀려날 수 있는 가벼운 죄였지만 김태원에게는 예외였다. 호통과 함께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무명 연주인에 대한 삐딱한 시선때문이었다.
“신변을 묻는 경찰관에게 ‘음악인’이라고 말할 때마다 사단이 났다.”
파출소를 나오는 얼굴은 멍이 들었다. 하지만 김태원은 개의치 않았다. 진짜 음악인이 되는 과정이라 여겼다. 시퍼런 멍은 영광의 상처였다.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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